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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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도량참법기도] 2월 18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가섭스님 2024-02-18
마하반야바라밀.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설 잘 보내셨죠?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진관사를 대표하는 분들만 앉아 계신 거죠. 얼굴 뵈니까 다 진관사다운 면모를 갖춰서 눈빛이 반짝반짝한데요. 오늘은 이제 자비도량참법 기도를 회향하는 날이기도 하죠. 저도 유튜브로 좀 봤습니다. 저도 이제 소임을 볼 때 연초가 되면 자비도량참법을 하곤 했는데, 자비도량참법은 말 그대로 자비도량이 핵심이잖아요. 자비도량을 건립하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제 <자비도량을 건립하자>라고 하는 주제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주지 스님께서 들어서자마자 박사를 받았다고 그러셔서 낯부끄러워서. 근데 사실은 사실이에요. 학위는 아직 못 받았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 학위 수여식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철학 박사를 받게 됐는데, 제가 원래는 우리 주지스님하고 같이 학교 다닐 때 박사학위를 제일 빨리 받을 거라고 소문이 났었는데, 제일 늦게 받게 돼버렸어요. 중간에 한눈을 많이 팔아가지고 늦게 받았는데, 우연치않게 정토 관련된 공부를 다시 하게 됐어요. 그래서 박사학위는 이제 <조선시대 정토신앙 연구>라고 하는 걸로 학위를 받게 됐는데, 조선시대 하면은 불교가 가장 어려울 때였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조선시대의 정토를 연구한 선행 자료들이 없어서 꽤 애를 먹었습니다. 자료를 찾는데. 그래서 제가 조선시대 정토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해볼까 하다가, 한 15년 전에 통도사로 성지순례를 갔는데, 그때 천일 기도하는 스님이 참법 기도를 하는데, 기존에 우리는 이제 자비도량참법만 알았는데, 그 스님이 하는 책이 미타도량량참법이라는 걸 가지고 참법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책을 하나 얻었어요. 절에 와서 쭉 읽어보니까, 내용이 너무 신심이 나고 또 너무 좋았어요. 특히 제가 살던 도량이 미타도량이었기 때문에, 그러면 이제 ‘내년부터는 이 미타도량참법을 가지고 정초마다 참법기도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이제 그 스님한테 책 복사본을 내는 걸 허락 맡고, 한 1천여 권을 찍어서 신도분들한테도 나눠드리고, 또 오는 인연들한테 하나씩 나눠드렸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 미타도량참법을 보니까 이게 조선시대에까지 면면이 이 참법 기도가 내려오는데, 이 중국에서부터 쭉 내려온 게 미타도량참법인데, 그 참법이 자비도량참법도 마찬가지지만은 굉장히 중요한 신행 내지는 수행의 한 방법으로 해왔던 거였어요. 그런데 자비도량참법만 해도 10권으로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옛날에 이게 너무 기니까 이걸 줄여가지고 소미타참법이라고 줄여서 한 기록도 있더라고요. 근데 이제 우리 진관사도 하지만, 예수재나 수륙재를 하지 않습니까? 근데 옛날에는 그 수륙재나 예수재의 핵심이 참법이에요. 근데 이게 너무 길고, 이제 오래 복원이 지금 되고 있지만, 하다 보니까 이 참법이 빠지고 공양만 남아 있는 거예요. 예수재나 수륙재가 원래의 원형을 찾으려면 공양 플러스 참법이 들어가야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참법이라는 게 그만큼 중요한데, 또 이 참법을 하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게 뭐냐 하면, 중생의 습성을 내려놓고,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본래 붓다의 성품을 드러내는 게 참법의 가장 큰 특징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 정토가 바로 그런 거잖아요. 정토가 이제 깨끗한 세계, 예토의 반댓말이니까, 좀 편안한 세계, 고통이 없는 세계, 그다음에 바로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세계, 이게 이제 정토인데, 조선시대 정토는 우리나라 불교가 들어와서 전래가 되면서, 정토에는 세 가지가 있거든요. 저 멀리 서방정토 세계가 있고, 그다음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정토로 만드는 게 있고, 또 하나는 마음이 정토인 세계가 있어요, 쉽게 말하면. 근데 우리나라에서 해방 이후에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온 스님들이 많이 들어와서 정토를 하다 보니까, 유심정토보다는 우리가 사후에 가는 극락정토 서방정토 세계를 많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조선시대의 자료를 보다 보니까 우리나라는 정토의 특징이 화엄선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화엄선이 이제 나중에 극도로 아주 최고의 수행 과정으로 가는 게 간화선이란 말이죠. 이 화엄선의 출발점이란 말이에요. 우리나라는 화엄선이 핵심이에요. 근데 화엄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정토도 유심정토 성향이 강합니다. 마음이 정토라는 거예요. 마음이 정토여야 된다. 그래서 조선시대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눠서 보니까, 그 당시에 선사 스님들도 전부 정토에 관련된 책을 쓰고, 정토에 의지했던 모습들이 있어요. 근데 그 정토는 우리가 기존에 생각했던 사후 세계의 정토가 아니라, 어떤 세계다? 마음이 정토인 세계인 거예요. 깨달음의 세계인 거죠, 일종의. 그래서 그런 것들로 조금, 이제 아주 조금 연구를 해놨어요. 그래서 다행인 것은 이후에 후학들이 조선시대 정토를 연구하는데 한국적인 시각에서 정토를 보는데 조금 이바지가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돼서 스스로 칭찬을 하게 됩니다. 제 자랑은 여기까지 하고요. 자비도량참법을 좀 이야기할까 하는데, 아까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자비도량을 건립을 해야 된다> 그게 목적이다 그랬잖아요. 근데 우리가 1년을 새로 열면서,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 그 첫 페이지에 자비도량으로 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수행 중에 하나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이 이제 늘 얘기하지만, 자비라는 게 뭐예요? 우리 이제 젊은 불자들도 있고, 또 절납이 오래되신 노보살님도 계시는데, 자비가 뭐냐 하면, 자비가 뭐예요? 자비.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었던 선물 중에, 선물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제 지혜라는 선물이 있고, 자비라는 선물이 있는데 자비는 온화하고 따뜻한 거예요. 자비스럽다. 자비스러운 마음 그러면 다른 거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지그시 눈을 감고, 내 마음이 온화하고 따뜻한지 이렇게 떡 보면 돼요. 근데 내 마음이 산란해, 마음이 차가워, 마음이 굳어 있어,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건 자비한 마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자비한 마음을 돌리는 거죠. 돌리면 되는 거예요. 온화하고 따뜻한 것이 왜 중요하냐 그러면, 온화하고 따뜻한 것이야말로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입춘이 지났으니까 제가 늘 가끔씩 엄청난 예언들을 하는데 들어본 적 있죠? 제가 엄청난 예언을 하잖아요. 봄이 오면 꽃이 필 거고, 겨울이 오면 눈이 내릴 거다. 중요한 건 뭐냐면 그때 다 우리가 건강한 모습으로 볼 거다. 이건 엄청난 신령스러운 일이에요. 우리가 때가 지나도 건강하게 늘 볼 수 있다는 거는 그것만큼 신령스러운 일이 없는데, 어쨌든 봄이 오니까 봄이 오면 따뜻해지죠. 따뜻해지고 온화해지면 어떻게 돼요? 생명이 움트게 됩니다. 이제 법문하려고 쭉 내려오는데, 아주 우리 진관사 도량이 고즈넉해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근데 이제 도량에 서 있는 나무들이 전부 지금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죠. 근데 이게 이제 온화하고 따뜻해지면 싹이 나기 시작해서, 녹음이 지고, 또 가을에는 낙엽이 지잖아요. 그런 것처럼 온화하고 따뜻한 거는 생명이 움트게 한다는 거는 변화하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내 마음이 온화하고 따뜻해져야지만이 내가 뭔가 성취도 되고 뭔가 승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이 굳어 있고 차가워 있고 얼어 있는 사람은 어떤 것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절에 와서 기도 성취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 또 무량 공덕을 짓기 위해서, 또 신행하는 분들에게 늘 강조하는 게 뭐냐 하면, 부처님 앞에 서서 발원할 때는 그 마음이 녹아야 돼요. 근데 이제 마음이 얼어 있어가지고 굳어 있어서, 아니면은 더 쉽게 말하면 뭔가 원망하는 마음, 뭔가 누구한테 미워하는 마음, 내지는 마음에 갈등하는 그런 것을 가지고 기도하면 안 된다는 거죠. 예를 들면 똑같은 원리잖아요. 언 땅에 씨를 뿌리면 안 되잖아요. 그죠. 뭔가 녹고, 좀 뭔가 포근한 데다가 씨를 뿌려야 싹이 나듯이, 그래서 자비라고 하는 건 그만큼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을 이루는 거에요. 그다음에 도량이라는 게 있어요. 그 도량(道場)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절을, 사찰을 도량이라고 얘기하는데, 그 도량은 한자로 쓰면 도장이라고 읽어요. 도장, 태권도장 할 때 도장이거든요. 근데 왜 도장이라 안 읽고 도량이라 읽느냐 그러면, 도장은 몸에 힘을 키우는 거를 도장이라고 그래요. 몸에 힘을 키우는 거. 마음에 힘을 키우는 걸 도량이라고 읽습니다. 그러니까 도량이라고 자비도량 그러면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의 힘을 키우는 곳이에요. 자비도량을 한다는 거는 내 마음이 온화하고 따뜻한 그런 마음의 힘을 키워는 기도인 거죠, 자비도량참법이라는. 근데 자비도량참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미움이 남아 있다면 이게 뭔가 잘못된 거라서 이건 점검을 해봐야 됩니다. 자비도량참법을 했는데, 기도를 하고 났는데, 나가다가 보니까 신발을 누가 밟고 갔어. 근데 그거 보는 순간 욱하는 게 올라와. 이게 이제 말짱 (헛수고)이에요. 이게. 이럴 때는 이제 점검해 봐야 돼요. 근데 왜 그러느냐 그러면, 기도를 했지만 습성 때문에, 화내는 습성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자비도량참법은 한 번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해야 됩니다. 꾸준하게. 우리가 이제 진관사에서 자비도량참법을 이렇게 하는 것은 인연이 맺어진 거예요.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이 인연 맺음을 힘으로 일상에서도 자비도량참법을 꾸준하게 해야 돼요. 스님이 시키든 시키지 않든, 누가 보든 안 보든, 자기 스스로가 자비도량참법을 쭉 읽으면서 또 독서해가면서 해야 된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비도량참법이 힘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자비도량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자비도량참법이 지금으로부터 한 1500년 전에 만들어진 말씀이잖아요. 경전은 아니에요. 이게 자비도량참법이. 양나라때 만들어진 거잖아요. 자기 부인 치씨를 위해서 만들어진 건데, 부처님의 말씀 중에 좋은 걸 다 모아가지고 만들어 놓은 건데, 이게 중국, 한국, 대만에서 유행을 해요.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게 1500년 동안에 내려온 거니까 얼마나 많은 다양한 것들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중간에 이제 중심 내용들은 같은 건데,- 그 중심 내용들을 몇 가지 점검해가면서 이건 꼭 해야지만이 자비도량참법을 건립할 수 있다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비도량참법을 해도 이게 좌로 가는 건지, 우로 가는 건지, 위로 가는 건지, 밑으로 가는 건지, 모르고 하긴 하는데 이게 방향감이 없단 말이죠. 그래서 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이 네 가지는 꼭 명심을 해야 된다라는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우리 어린 학생들도 와가지고, 가장 쉬운 언어로 이제 말씀을 드릴게요,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비도량은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에 힘을 키우는 기도다. 이거는 이해하셨죠? 그래서 그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의심하지 마라>입니다. 의심하지 마라. 우리가 왜 의심하지 마라 하냐 그러면, 의심은 뭐예요? 번뇌예요. 번뇌. 근데 우리는 살아오면서 법에 대한 의심을 하면 그게 자기한테 큰 도움이 되는데, 저 법은 왜 저렇게 됐을까, 저 법은 내가 왜 얻지 못할까 이렇게 의심하면 좋은데 뭘 의심하냐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의심을 해요. 내가 갖지 못한 것에 의심. 그래서 그 의심이라고 한 용어로 돼 있지만 이건 다른 말로 번역하면 번뇌라는 뜻이에요. 번뇌. 다른 말로 하면 번뇌는 뭐예요? 괴로움이라는 말이잖아요. 괴로워한다는 거예요. 여기 자비도량참법에 첫 번째 나오는 게 의심하지 마라거든요. 의심하지 마라. 이걸 아주 편한 말로 풀이하면 괴로워하지 마라라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괴로워하는 게 습성화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생각이 올라오면 의식이라는 게 있거든요. 의식. 의식이라는 게 있는데 의식은 구사론이나 이런 데서 보면, 논서에 보면, 의식의 의자는 <전 생각> 이렇게 번역돼요. 식은 <후 생각>. 그 전 생각과 후 생각이 찰나 동안에 생멸하면서 우리 생각이 바뀌는 거예요. 의식이라고 하는 게. 의식이 있죠. 의식 없는 분 손들어보세요. 난 의식이 없다. 의식이 없으면 살아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근데 의식도 전의식이 있고, 무의식이 있어요. 조금 어려운 걸 한번 터치해보면 전의식은 뭐예요? 안이비설신 다섯 가지 느끼는 거, 이를 전의식이라고 하고, 그다음에 생각으로 하는 거를 무의식이라고 표현하죠. 무의식. 무의식이 하도 또 다양해 이게. 이거는 우리가 조금 알아둬야 될 게, 우리의 의식의 흐름이 원래 그렇게 고정돼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한번 분석의 틀을 통해서 나를 분석할 필요는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보는 거, 듣는 거, 맛 보는 거, 냄새 맡는 거, 몸으로 느끼는 거가 있는데 그거를 통괄하는 게 의식인데, 첫 번째 의식이 뭐냐 하면 육식이잖아요. 의식. 그게 의식이 전 생각과 후 생각이 자꾸 교차하면서 나를 만들어가는데, 그 교차하는 핵심이 뭐냐 그러면, 나라고 하는 생각이에요. 그거를 말라식(末那識)이라고 하고 염오식(染汚識)이라고 얘기해요. 염오식. 물들인다. 염오식. 이거는 이제 다른 말로는, 제가 만들어낸 말로 표현하면, 이거를 저는 정체식이라고 그래요.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러 색깔, 세상에 여러 색이 있는데 사람마다 좋아하는 색이 다 다르고, 세상에는 너무 많은 노래가 있는데 노래하는 게 다 달라요. 어떤 사람들은 트로트 좋아하고요. 저희 은사 선생님은 트로트를 너무 좋아하세요. 제가 어디 모시고 갈 때 트로트를 틀어드리면 너무 좋아하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또 발라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죠. 그런 것처럼 그거를 구분하는 게 일곱 번째 식인 거예요.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식이 있는데 여덟 번째 식은 이런 경험들을 다 모아놓는 의식이 또 있는 거예요. 그 모아놓는 것에 자기의 취향대로 꺼내다 쓰는 거, 저거 좋은 거, 저거 내가 싫어하는 거, 저거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 거. 이런 식으로 해서 이제 쓰는데 그러다 보니까 그 생각이 올라올 때 무시겁래로 우리가 했던 마음 중에 뭐가 있냐면 걱정과 염려라는 게 있어요. 그래서 의심하게 됩니다. 의심이 왜 이게 괴로운 거고 이게 고통이냐면, 의심하게 되면은 생각이, 어떤 사물이 바르게 보이지 않고요. 이게 굴절돼 보여요. 의심하게 되면. 굴절된다는 게 뭐냐면 바르게 들어온 게 아니라 거꾸로 보여요. 진짜가 아닌데 진짜처럼 보이고, 가짜인데 그게 진짜처럼 느껴지고 그런 거란 말이죠. 그걸 전도라고 그러죠. 전도. 의심하게 되면 전도된 마음이 생기게 돼요. 전도된 마음이 생기게 되면 어떻게 돼요? 몽상을 하게 돼요. 몽상은 뭐예요? 엄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거기 생각을 가지고 막 이제 여러 가지 자기의 경험과 그동안에 들은 이야기, 느낀 걸 통해가지고 많은 생각들을 이 번뇌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의심이 전도된 생각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몽상까지 가는 것, 이게 총체적으로 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괴로움인 거예요. 괴로움. 그래서 이게 첫 번째 자비로운 참법을 할 때는 그런 의심을 내려놓는 거예요. 걱정을 내려놓는 연습부터 해야 됩니다. 그리고 자비도량참법을 통해서 그런 걸 내려놔야지, 자비도량참법을 통해서 또 그게 나중에 자비도량참법을 쭉 오래하다 보면 그 힘을 얻게 돼요. 걱정을 내려놓게 됩니다. 출가해서 부처님 법을 믿고 따르는 스님들이, 저는 출가해서 가장 큰 공덕이 뭐냐 하면 다른 것보다도 편안하게 자유롭게 사는 것도 있지만, 저는 출가에서 가장 큰 공덕은 뭐냐 하면, 스스로 걱정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힘을 얻게 돼요. 그게 저는 출가의 가장 큰 공덕이라고 봅니다. 근데 우리는 너무 걱정을 많이 해요. 그러니까 그게 번뇌가 되다 보니까 괴롭죠. 그래서 의심을 내려놔라. 의심을. 그다음에 의심을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은, 그다음 나오는 구절이 <신심을 가져라>라는 거잖아요, 믿음을 가져라. 믿는 마음을 가져라. 믿는다는 건 어떤 거예요?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믿는다는 그 네 가지는 첫 번째로는 뭘 믿어야 되느냐. <내 자신을 먼저 믿어야 돼요.> 이걸 근본신이라 그래 근본신. 나를 믿어야 돼요. 그래 나를 믿는데 내 생각과 내 고집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원래 다 본래 붓다로서 이 안에 원래 맑고 밝고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이 있다>라고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그것부터 출발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 걸 드러내고, 그걸 믿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고, 또 부처님 가르침을 열심히 수행하는 스님들을 봐야 그게 합일되는 거죠. 그 채널이 맞아지는 거죠. 그래서 ‘내가 나는 중생이야, 나는 괴로운 사람이야. 나는 늘 운이 없어,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일도 성취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제 우리 청년들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자기 스스로가 자기한테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법을 배워야 된다는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근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법을 잘 몰라요. 너무 인색해. 그게 무슨 세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자기한테 칭찬이 너무 인색해요. 자기한테 칭찬이 인색하다 보니까 마음도 좁아질뿐더러 자기를 칭찬하는 게 안 되다 보니까, 남도 칭찬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믿는데 자기 자신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거울을 보고, 거울을 보고 화장만 하지 말고, 내 마음에도 칭찬해줘야 돼요, 내 자신에게. 내 마음속에 맑고 밝고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이 있다라는 걸 믿는 마음을 확인해야 돼요.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게 첫 번째 자기 자신을 믿는 거잖아요. 그런 믿음을 만들어내야 그다음에 부처님을 봐도 부처님의 광명이 내 안으로 내려앉을 수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봐도 그 고구정령한 말씀이 내 안에 녹아내릴 수가 있는 거죠. 스님들을 봐도 스님들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나를 믿자. 첫 번째는 이제 의심을 드러내고 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신심을 갖는 거잖아요. 두 번째로는 자비도량참법의 가장 핵심인데 이걸 하기 위한 거예요. 이제 의심 끊어내고 신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자비도량참법이 네 글자로 압축해서 말씀을 드리면 해원석결(解寃釋結)이에요. 해원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풀어내는 거예요. 그리고는 또 하나는 석자도 푼다는 말인데, 그것도 미운 마음을 푸는 거예요. 원수진 마음을 푸는 건데, 미운 마음을 푸는 건데, 이 해원석결이 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원래의 목적이에요. 양무제의 치씨 부인이 살아생전에 좀 옹졸했었나 봐요. 그래서 좀 인색한 마음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그래서 뭐가 돼요? 죽어서 구렁이가 되잖아요. 그래서 꿈에 나타나가지고 본인의 그런 나쁜 갈래에 떨어졌는데, 그걸 구제해달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나쁜 갈래에 떨어지는 게 왜 떨어진다?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떨어진다는 거예요. 원망하는 마음 때문에 떨어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구를 미워합니다. ‘저 원수 같은,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그런 얘기 많이 하죠. 근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이었는데 그게 원망하는 마음이 되고, 또 처음에는 좋은 인연을 만났는데 그게 서로 간에 미워하는 마음이 되는 건 왜 그럴까요? 가까이 있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죠. 가까이 있다 보면. 멀리 있는 사람들은 해원석결, 풀 일이 없어요. 이 해원석결은 전생까지 다음 생까지 내일까지 나의 미래를 그렇게 점철시키는 것은 같이 살던 사람들로 인해서 그래요. 가장 큰 게 뭐예요? 가족입니다. 친족들이 그래요. 남과, 타인과 이렇게 같이 지내다가 원망이 되고 미워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이 다 전체가, 전체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친족 간에, 가족 간에 이 원망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서로 상처받고 서로 얼굴 안 보고 살고 그럴 경우가 많죠. 그러니까 이제 자비도량참법을 했는데 마음에 미운 마음이 안 풀린다. 이거는 또 진료를 또 해봐야 되죠. 전문적으로, 또 우리 주지스님 만나가지고 상담을 하셔야 돼요. 특단의 조치를 받으셔야 돼요. 자비도량참법을 하게 되면은 기도를 할 때 저도 그랬습니다마는, 자비도량참법을 처음에 시키면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게 뭐냐 하면, “눈물이 나요.”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 경험해보셨어요? 자비도량참법하다가 눈물 흘리신 분 계세요? 우는 분들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알게 모르게 마음에 쌓였던 미움의 업식이 녹아내리는 거예요. 그 미운 마음이라는 게 사람 마음을 차갑게 굳게 하잖아요. 그게 녹아내리는 거거든요. 이게 자비의 힘인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이제 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는 제일 중요한 게 가족들하고 잘 지내야 돼요. 가족들하고 잘 못 지내면 자비도량참법은 무릎이 깨지도록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예를 들자면 자비도량참법을 여러분이 오늘 마치고 회향을 했잖아요. 그러면 오늘 가서 제일 할 게 뭐냐? 남편과 아내의 손을 다 잡고 “나 때문에 참 고생 많았어. 내가 앞으로 잘할게.” 이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미워하는 눈빛을 보내면 안 돼요.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들도 내가 인연을 맺어서 왔잖아요. 애가 오고 싶어 온 게 아니잖아요. 내가 만들어 놓은 인연이란 말이죠. 근데 그 인연들한테 너무 상처되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동안, 알게 모르게. 근데 요즘에 이제 프로그램 중에, 우리 아까 주지스님께서 tv 많이 보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 드라마는 아니에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고 하는 그런 프로그램 있잖아요.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을 제시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이들 있잖아요. 그 아이들을 분석해 보면 문제는 그 아이였어요? 환경이었어요? 90%가 환경이었어요. 물론 타고난 기질이 그런 아이들도 있어요. 없는 건 아닙니다마는 대부분이 뭐예요? 그 아이가 그렇게 문제 행동하는 것은 그 가정이 가졌던 환경 문제였던 거예요. 환경 탓이었던 거죠. 환경이 문제였던 거죠. 여기 우리 꼬마들이, 우리 어린 법우들이 와 있지만, 이 법우들이 이렇게 선량한 복을 지을 수 있는, 부처님 전에 앉을 수 있는 건 뭐예요? 가정환경이 좋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기 앉아 있는 아이들이 문제아가 될 수가 없어요. 여기 앉아 있는 우리 진관사 도량에 같이 와서 함께한 아이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이끌 인재들로 성장할 겁니다. 여기서 장관도 나오고, 정치인도 나오고, 또 재벌 총수도 나오고 그러겠죠. 축원의 박수 한번 보내주세요. 그런 것처럼 그 문제, 우리가 가정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런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자비도량참법은 해원석결이다. 미운 마음을 덜어내는 거다 라는 거예요. 그 미운 마음을 덜어내려면은 하나의 그 좋은 기재가 있는데 그 기재가 뭐냐 그러면 발보리심이에요. 발보리심. 그래서 이 해원석결을 하는 거, 참회를 통해서 해원석결하는 건데, 그 해원석결을 참회를 제대로 하려면 마음에 보리심이 올라와야 돼요. 보리심. 보리심을 발하는 거죠. 보리는 뭐예요? 지혜죠, 지혜. 반야, 지혜, 보리 같은 말인데, 지혜심이에요. 지혜심, 반야심. 반야심을 발하는 거예요. 발한다는 거는 없는 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펼쳐내는 걸 발이라고 그래요. 출발 이렇게 하죠. 출발. 출발은 뭐예요? 여기서 출발하는 거잖아요. 어디 한 곳에서, 있는 곳에서. 그러니까 이 발보리심, 발은 원래 내가 없던 거를 받아서 만들어서 하는 게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보리심, 보리라는 건 반야라는 거, 맑고 밝은 마음, 맑고 밝은 마음을 드러내는 거예요. 발보리심은. 드러내면 어떻게 돼요? 맑고 밝아지니까 해원석결이 되는 거예요. 내가 미운 마음이 든다는 거는 어두운 마음이란 말이죠. 거기에 발보리심을 하는 거예요. 발보리심. 발보리심을 어떻게 해요? 알려드릴까요? 아주 쉬운데. 이렇게 앉으셔가지고 마음이 밝은지 맑은지 돌이켜보면 돼요. 얼마나 쉬워요? 이거 0.1초도 안 걸리죠. 돌이켜보는 거. 이거를 이제 요즘 말로는 메타인지라 그래요. 메타인지 들어보셨어요? 메타인지. 나의 어떤 마음에 또 다른 나를 만들어서 이렇게 살펴보는 걸 메타인지라 그래요. 전문용어로. 조금 똑똑해 보이죠. 이런 용어 쓰니까. 그래서 그렇게 돌이켜봐야지 말이 된다. 그게 발보리심이다라는 겁니다. 발보리심. 발보리심이 어려운 게 아니에요. 맑고 밝은 마음을 발현해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발보리심까지 이루어진 다음에, 마지막으로 회향심인 거예요. 회향심. 요게 자비도량참법의 큰 줄기입니다. 회향심은 뭐예요? 내가 기도를 통해서 느꼈던 것, 고마워. 내가 이게 중 되고 이런 경험 처음 하네요. 내가 출가하고 나가지고 법문하다가 이렇게 현금을 받아보기로는. 아이고 야, 합장도 잘하네. 아이고 이런. 새로 오신 부주지스님이세요? 회향심 얘기하니까 바로 이렇게 회향을 그냥 몸으로 보여주는 애기 보살님이 계시네요. 이런 게 회향심인데, 오늘 법문 소용없어. 우리 아이가 그냥 몸으로 보여줬어요. 아기 보살님이. 근데 회향심이라고 하는 거는 뭐냐 하면, 내가 기도를 통해서 느꼈던 바의 느낌들을 내 홀로 마음으로 간직하는 게 아니라, 나의 아이들에게, 나의 가족들에게, 나의 이웃들에게, 나의 인연들에게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근데 우리가 이 회향심을 잘 몰라요. 우리 불자들이 좀 약한 부분이 요 회향심이 좀 약해요. 내가 느낀 것들이 있거든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기도하는 속에서 느꼈던 느낌이 있는데, 그리고 변화들이 있는데, 그 느낌과 변화들을 자기만 간직하고 있어요. 이제는 이야기할 때가 됐습니다. 그 이야기해서 같이 공유하면, 같이 향유하면, 뭐가 되냐면 그거를 다른 말로 전법포교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전법포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느낀 바, 내가 깨친 바, 내가 얻은 바만큼의 이야기를 나의 가족과 나의 인연들과 함께하는 거, 이게 전법포교인 거죠. 그래서 이 자비도량참법이 회향을 하게 되면, 회향심을 갖고 하게 되면 전법포교를 하는 거잖아요. 보세요. 이것만큼 전법포교에 좋은 게 뭐가 있어요? 마음에서 신심이 우러나잖아요. 지금. 그래서 우리가 자비도량참법기도를 회향한 만큼, 지금 말씀드렸던 의심을 내려놓고, 신심을 갖고, 그다음에 해원석결하고, 해원석결을 하려면 발보리심을 해야 되고, 발보리심을 이룬 다음에는 회향심까지 마음에 갖는다면 우리는 참다운 자비도량참법을 성취할 거다. 그래서 여러분 올 1년 내내 진관사와 함께, 또 우리 최고의 수행자이시고 또 진관사의 탑이신 우리 법해 스님하고 함께 자비도량참법을 건립하시기를 축원 올리면서 법담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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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하례법회] 2월 18일 신년하례법회 법문
회주 계호스님 2024-02-18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뵈니까 제가 또 힘이 솟는 것 같아요. 지난 번에 입춘날 맞이해서 세 번째 설날 맞이했고, 이제 구정이 완전히 됐죠. 네 번째 새해입니다. 올해는 무슨 띠라고 그랬죠? 갑진년에 아주 값진 해가 될 수 있는 용이에요. 그래서 신화엄경에 보면은 용은 동쪽에 있으면서 부모님과 같고, 처음 같고, 시초와 같다 그랬죠. 일의 근본이 되고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실천행이 될 수 있다 그랬습니다. 진관사 신도님들이 4박 5일, 닷새간 자비도량참법 기도를 하면서,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참회업장을 다 하셨죠? 업장소멸하셨죠? 아까 가섭 스님 법문 저도 유튜브로 보고 있었는데, 스님께서 철학박사 수료해서 처음 와서 이렇게 법문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는 자주자주 큰스님의 법문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내셔야 돼요. 어렵다 생각 내지도 마시고, 자주 들어서 지나가는 인연이라도 맺어야 되거든요. 기도라는 게 성취라 그랬잖아요. 근수(勤修), 부지런히 닦는 게 바로 기도라고 그랬거든요. 올해는 청룡, 완전히 용의 해가 되는데, 이 용이라는 거는 12지 가운데 상상의 동물이라 그래요. 실제로 자축인묘사오미신유술해는 다 있죠. 쥐띠도 있고, 소띠도 있고, 토끼띠도 있고, 호랑이 띠도 있고, 여러 가지 띠가 있는데 용은 상상의 동물이라서 좀 이 변화가 무쌍합니다. 하늘 위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물속에 들어갈 수도 있고, 땅 위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데, 이 모양은 어떻게 생겼냐면요. 우리가 보통 용은 머리는 낙타와 닮았다 그래요. 그리고 뿔은 보통 사슴뿔이라 그러죠. 사슴뿔과 닮았고, 눈은 토끼와 닮았다 그러고요. 또 귀는 소귀처럼 생겼다 그래요. 목은 뱀 같고, 또 비늘은 잉어 같고, 발바닥은 호랑이 발바닥 닮았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에요. 용꿈을 꾸면 굉장히 좋다고 하죠. 그런데 서양 문화권에서는 용이 굉장히 좋지 않은 현상으로, 마귀의 모습이다라고 하는데, 이 동양권에서는 상서로운 동물로 봐요. 그래서 왕실에서는 왕이 입는 옷은 곤룡포라 그러고, 왕이 앉는 자리는 용상이라 그래요. 그래서 왕권을 상징한다 고 합니다. 근데 절집에서는 이 용을 수호신으로 보고, 호법신장, 우리를 도와주는 그런 신장님의 역할을 해요. 약찬게에도 나오죠. 그래서 용을 상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올해는 여러분들이 정말 용과 같은 변화무쌍한 마음이지만, 항상 일념으로, 한마음으로 생각하시면 돼요. 생각이 너무 바뀌면 이게 뚜렷하지 않아 삼매에 들지 못하죠. 그래서 보통 내가 일념에 들려면은 한 생각이 되어야해요. 우리가 독서를 할 때 독서 삼매에 들어가면, 옆에 누가 봐도 모르죠. 내가 공부의 정진에 들어가면요, 가만히 있으면 누가 옆에 와도 모를 정도로 그래야 되는데, 기도하다 말고 뒤 돌아보고, 기도하다 옆에 들어오고, 기도하다 말고 뭐 하고, 기도하다 말고 전화받고 나가고. 좀 그런 경향이 있는데, 올해는 마음을 좀 안정시켜가지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도록 합시다. 편안한 마음이 부처님이거든요. 풍요로운 마음이 불성이고, 건강한 마음이 불성이고, 자비로운 마음이 바로 불성이에요. 불성이라는 거는 좋은 마음 나쁜 마음 다 합해서 불성일 수도 있어요. 좋은 마음만 생각한 게 불성이 아니고. 우리가 파도가 그대로 물이잖아요. 그렇듯이 번뇌 즉 보리거든요. 그래서 중생과 마음과 부처님은 세 가지가 차별이 없다고 화엄경에서 얘기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중생이라 하지만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해서, 이 마음이 그대로 뭐예요?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우리가 법구경에 보면 돌아갈 때 행이 두 가지가 남아요. <선행과 수행>이에요. 선행이라는 건 복을 짓는 걸 선행이라 그러고, 수행이라는 건 열반에 들어가는 걸 수행이라 그래요. 왜냐하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부지런히 열심히 수행한다 그러잖아요.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할 때 부처님이라는 말은 수행해서 얻어지는 결과물이에요. <선행공덕 적선지가(積善之家)>라고 그러잖아요. 선을 닦는 건 복을 닦는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복 짓는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행복할 때 남도 행복한 거예요. 그런데 내가 했다는 마음 생각조차 없으면서 꾸준히 열심히 가면은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거예요. 내가 불편하면요, 어떤 사람이 옆에서 해도 내가 불편한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되고, 누구 탓하지 말라 그랬죠. 다 자업자득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새해를 맞이해서 새 마음으로 새로운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정진 열심히 하시면서 가피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지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 정진하면은 그게 다른 데로 가는 게 아니에요. 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나한테로 돌아오는 거예요. 하늘에다 침 뱉으면 침이 어디로 떨어져요? 내 얼굴에 떨어지잖아요. 똑같아요. 그러니까 원망하는 마음, 나빠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도 내지 말고 오로지 선행스러운, 착한 마음만 내면 그게 바로 부처님이에요. 오늘 아까도 주지스님 말씀하는데, 부처님학교 연다 그랬죠. 부처님이 될 수 있는 학교가 만들어져야 되는데, 학교가 여러 가지 있어요. 지혜의 학교도 있고, 공덕의 학교도 있고, 나눔의 학교도 있고, 마음의 정원의 학교도 있고, 여러 가지 학교가 있는데, 초파일, 부처님이 태어나셨잖아요. 그렇죠. 탄생일을 맞이해서 부처님학교에 다 들어오면은 무량한 공덕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만 학교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스님들도 다 학교에 들어간 거예요. 이 문에 들어오면은 벌써 일은 마친 거예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씀 들어보셨죠? 오늘 여러분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는 소리가 제가 있는 저 밑에서도 다 들려요. 왜냐하면 마이크로 들리니까. 옛날에는 나가원 좁은 방에서 했을 때는 답답했는데, 함월당을 이렇게 불사를 하고 나니까, 모든 사람들이 함께, 비구니 스님, 우리 대중 스님뿐만 아니라, 청년, 청소년 법회, 어린이 법회까지 여기 다 왔잖아요. 함께 한마음으로 이루면 안 될 일이 없는 거예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듯이 다 이루어져요. 열심히 하면서 부처님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다 갖추고 있지만 안 해서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할 수 있다라는 거를 여러분들이 굳게 믿고, 신심과 자비심과 지혜의 힘으로써 살아간다면 어려운 건 하나도 없다 생각해요. 과거는 없고 미래도 이제 앞으로 닥치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게 언제예요? 지금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현재를 중요시해가지고 현재를 직시하면서 살아가면은 세상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없고, 못할 것이 없는 거예요. 또 20대, 30대는 아직까지 나이가 있잖아요. 80대 ,90대 되는 사람 그런 보살님들은 연세가 있지만은 그래도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생각 내시고, 밝은 마음, 맑은 마음 내시면 불사는 성취됩니다. 부처님 일은요, 뭐든지 이루어지지 않는 게 없다 그랬어요. 저도 가만히 생각하니까 절집에 들어온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됐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온 생각밖에 안 나요. 68년도 졸업하고 절에 왔는데, 마음은 그대로 소녀 같은 마음인데, 몸만 늙은 거예요. 그래서 몸은, 보이는 세계는 물질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정신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외가 명철돼요(內外明徹).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나 똑같이 수행해야 돼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너무 잘하는데, 안 보이는 데서는 이상한 행동하고, 이중적인 생각한다는 말 들어보셨죠? 항상 여러분들이 생각을 가질 때 안과 밖이 철두철미한 사람들이 정말 성공하는 사람이지, 안에서는 잘못하다가 밖에 나가면 너무 잘하는 분들도 계시고, 안도 잘 못하고 바깥도 잘못하는 사람은 더 못하는 거죠. 그건 하근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안과 밖이 달라지지 않도록 열심히 살 수 있는 불자가 돼야 되겠죠. 자비심을 발하고 실천행을 할 수 있는 그게 선행공덕이에요. 선근공덕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적선공덕, 선근공덕, 선행공덕.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에 돌아갈 때 행이 두 가지 남는데 선행공덕과 수행공덕만 남는다. 열심히 살면서 “내가 살아가는데 조금 남한테 좀 잘못한 게 없는가” 이걸 돌이키면서 잘할 수 있는 불자가 돼야 되고, 자비로운 마음이 몸에 배야 돼요. 아까 자비란 말 들어보셨잖아요. 고통을 주지 않는 거는 락이라 그러고, 자자는 자비로 사랑만 주는 게 자자예요. 발고여락(拔苦與樂)이에요. 그래서 고를 빼주는 거는 비고, 비증보살의 제일 으뜸인 보살이 지장보살이에요. 자에 으뜸가는 보살은 관세음보살이고, 그럼 지혜는 문수보살, 실천은 보현보살이에요. 아는 건 너무 잘 알잖아요. 안 돼서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는 아는 것보다, 지식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 돼야 돼요. 그래서 열심히 살면서 항상 올해는 작년보다는 좀 잘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 가져야 되겠죠. 그래서 갑진 한 해가 되면서 정말 용 꿈꾸는 그런 용이 되어서 상상 못하는 그런 생각은 갖지 마시고, 할 수 있는 생각, 도와줄 수 있는 생각, 이타행, 자리이타행을 할 수 있는 불자가 되도록 꼭 그렇게 명심하세요. 그럼 저도 부응해서 같이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늘 여러분들에게 108 원력문 나눠주셨죠? 이거를 그냥 갖다 놓으면 도서관밖에 안 됩니다. 가지고 꼭 절을 한 번씩 하세요. 노보살님들은 힘이 드시면 반 배만 하셔도 돼요. 저 같은 경우도 같이 반 배하고. 또 이게 되는 여력 있는 보살님들이나 스님네들은 따라서 하면 돼요. 청정한 마음으로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청정한 마음으로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청정한 마음으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마지막에 또 있죠. 부처님 법 전하는데 온 삶을 바치겠습니다 가 마지막 구절이에요. 그래서 108배 하면은 이게 다 공덕의 문이 되는 거예요. 아까 그랬죠. 선행은 자비의 문에 들어가는 씨앗이고, 이 수행이라는 것은 열반에 들어가는 문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우리 보살님들이라든지, 신도님이라든지, 청년 법회라든지 청소년 법회들 학생들, 어린이법회 학생들 말 너무 잘 듣네요. 아까 스님한테 보시한 학생도 있었죠? 꼭 이거 읽고 같이 따라하도록 하세요. 그래야지만이 이게 공덕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여러분들한테 나눠주는 거는 함께 같이 실천하자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꼭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래야지 진관사의 자비의 문이 활짝 열려요. 다 같이 부처님 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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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2월 12일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02-12
- 주제 : 自己自體佛(자기자체불) - 안녕하십니까. 갑진년 정초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갑진년 정월 초사흘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有三種因果 유삼종인과①六道善惡因果 ②三乘單敎因果 ③一乘圓教因果①육도선악인과 ②삼승단교인과 ③일승원교인과因該果海 果徹因源 相入相卽 法界因果인해과해 과철인원 상입상즉 법계인과一一塵中 即見法界 三世自身 卽見佛身일일진중 즉견법계 삼세자신 즉견불신 불교는 <인과와 깨달음>, 인과와 깨달음인데요. <인간은 신행이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또 <깨달음은 심원이라>,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몸으로는 인과를 행하고, 마음으로는 깨달음을 원하는 것이 불자다. <신행, 심원, 인과, 성불>, 그게 이제 불자인데, 인과가 뭐냐. 세 가지로 가르쳐요. 첫째는 육도선악인과(六道善惡因果). 육도는 중생 세계거든요. 거기는 선인과가 있고, 악인과가 있는데, 그것이 육도 세계라고 가르치고. 그다음에는 깨달음의 인과인데, 삼승단교인과(三乘單敎因果)라. 삼승은 보살승, 또 연각승, 성문승 그런데, 다 이 깨달음을 위해서 정진하는 분들이 삼승이거든요. 근데 이 삼승은 단교라고 해서, 홑 단자, 단일이라는 단자, 따로따로 해요. 성문이 닦는 길이 따로 있고, 연각이 닦는 길이 따로 있고, 보살이 닦는 길이 따로 있어서 이걸 단교라 그래요. 단교. 그래서 삼승단교인과가 있고. 그다음에 삼승이 더 깊어지면 일승이 되는데, 일승은 불승이라 그래서 부처님의 세계를 말해요. 그래서 삼승, 일승. 삼승은 불제자, 일승은 부처님 세계. 그래서 일승인데, 삼승은 단교인데 일승은 둥글 원자, 가르칠 교자, 원교(一乘圓教)라고 하거든요. 원교. 일승원교. 일승원교는 법계인과를 가르쳐요. 법계, 온 법계의 인과를 말하는 게 일승원교인데, 그래서 오늘 법문은 <법계인과와 구래성불>. 그럼 성불은 이제 뭐냐. 다겁성불을 또 가르쳐요. 중생 근기에 따라서 오랫동안 다겁(多劫)을 통해서 닦아야 성불한다. 이게 다겁성불이고요. 또 구경성불(究竟成佛), 불자는 끝에 가면 끝끝내 다 성불한다. 이게 구경성불이에요. 다겁성불, 구경성불, 또 찰나성불을 가르쳐요. 찰나에 성불한다. 찰나성불.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구래성불(舊來成佛). 구래가 뭐냐. 옛 구자, 올 래자인데 옛날부터 이미 성불했다. 이게 구래성불이에요. 구래성불, 옛날부터 성불했다 이거지. 그리고 이 구래라는 말을 본래라고도 써요. 본래 성불했다. 원래라는 말도 써요. 원래 성불했다. 그래서 구래성불, 원래성불, 본래성불 이렇게 가르치는 게 일승원교인데, 일승원교는 법계인과(法界因果)이기 때문에 그래요. 법계인과는 뭐냐. 일체중생, 또 제불보살, 산하대지, 이걸 삼종세관(三種世間)이라고 그러는데, 삼종세간이 전부 이게 일법계예요. 삼종세간이 한 법계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 아주 짧은 한순간이 일 찰나인데, 이 법계인과에서는 일 찰라가 무량겁이에요. 이건 선악인과나 삼승단교인과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법계인과만 통하는 거에요. 온 법계가 하나기 때문에 원일무이다. 원래 하나고 둘이 없다 이거예요. 이게 해인삼매 화엄세계거든요. 원일무이. 그래서 아주 찰나가 무량겁이고, 한량없는 세월이고, 일진이 만법계라, 한 조그마한 티끌이 온 법계에 다 해당되는 게, 이게 법계인 거예요. 그러니까 또 시작이 바로 끝이다. 발심이 바로 성불이다. 그래서 삼승단교인과는 시작과 끝이 다른데, 법계인과는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이거를, 다르지 않은 걸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상입상즉(相入相卽)이라고, 서로 상자, 들어갈 입자 시작에서 결과로 들어가고, 결과에서 시작으로 들어가고, 상입상즉 법계인과라, 그래서 시작 없는 결과는 없고, 결과 없는 시작은 없다. 그래가지고 이걸 비유로 가르친 게 10전법인데, 동전 10개. 동전 10개를 가만히 보면 동전 하나하나로 이루어졌어요. 1전이 없으면 10전도 없다. 또 10전은 전부 1전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1전이 10이 되고 또 10전은 1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화엄경 성불 세계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다. 하나가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하나다. 이거를 <화엄경 법계 연기 불신 세계>라고 그래요. 부처님 몸의 세계다. 그래서 법계 연기 가르침은 일체중생이 다 부처님 몸 안에 들어있어요. 일체중생이 다 부처님 몸 안에 들어있고, 또 부처님이 중생의 몸 안에 들어있어요. 이게 상입상즉이에요. “아따 이게, 복 받으려 할 기도인데 이게 성불 얘기만 자꾸 합니까?” 이게 근데 성불 없는 복이 없어요. 그게 법계인과예요. 또 복 없는 성불이 없고, 복이라는 거는 너무너무 좋은 건데 생겼다 없어져요. 그게 문제예요. 복은 한 복이 오래오래 가는 게 아니라 생겼다 없어져. 그래서 이걸 생멸 세계라고 하거든요. 나고 죽는 세계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상주해요. 항상 머무는 거예요. 광명이요. 늘 빛나는 거예요. 그래서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비춘다. 이게 깨달음의 세계거든요. 그래서 이 법계인과는 <화엄성중>하면 이미 성불 한 거예요. 일즉다에요, 그게. 여기 화엄성중 정근하는 거 맞아요? 옳게 말했네. 같이 해보실래요. “시작. <화음성중>. 끝.” 이미 다 된 거예요. 이게 일즉다에요. 하나가 곧 많은 것이다. 1전이 바로 10전이에요. 10전이 바로 1전이고. 그래서 법이 가득하다. 법원만이라고 하는 걸 가르치는데, 법원만은 시작법도 원만하고, 마지막 성취법도 원만하고, 그래서 초발심이 시작인데, 초발심법과 이 구경각(究竟覺) 법문이 똑같다. 이게 상입상즉이다. 초발심이 구경각으로 들어가고, 구경각이 또 초발심으로 들어가서, 서로 들어가고 서로 하나가 된다. 이게 불승세계, 일승세계라 그러거든요. 불승세계 일승세계를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화엄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그 정근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이미 다 성취가 된 거예요. 일전 일전이 없으면 10전은 없다. 이게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도 없다. 이게 법계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닦아서 나중에 이룬다 이거는 삼승 단교, 하나하나 가르치는 단교인과고, 하나가 모든 것이다 그러면 이거는 일승원교인과라는 말이죠. 둥글 원자, 원교인과. 성불을 딱 하고 보면 지금 성불 한 게 아니라 옛날에 이미 성불했다. 이걸 아는 게 이게 구래성불이에요. 할 때는 몰랐는데 하고 나니까 옛날에 성불을 했더라. 이걸 알게 돼요. 이거 참 묘하네. 진짜. 一乘圓敎舊來成佛일승원교구래성불問 具縛有情 未斷煩惱 福智未成 以何義故 舊來成佛耶문 구박유정 미단번뇌 복지미성 이하의고 구래성불야答 煩惱未斷 不名成佛 煩惱斷盡 福智成竟 自此已去 답 번뇌미단 불명성불 번뇌단진 복지성경 자차이거 名為舊來成佛 (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二.韓佛全6,829中) 명의구래성불 (법계도기총수록권하지이.한불전6,829중) 그래서 여기서 이제 혼란이 와가지고, 의상스님 저술에 보면 그게 나와요. 구박유정(具縛有情)이, 구박이라고 하는 것은 갖출 구, 얽힐 박자인데, 번뇌망상이 많이 다 얽혀 있다 이 말이에요, 중생이란 말이죠, 유정은. 미단번뇌(未斷煩惱)하고, 번뇌를 끊지 못하고, 복지미성(福智未成)이어늘, 복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이하의고(以何義故)로, 어떠한 뜻이 있어서, 구래성불야(舊來成佛耶), 옛부터 이미 성불 했느냐. 이렇게 질문하는 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의상스님이 대답을 하기를, 번뇌미단(煩惱未斷)이면, 번뇌를 끊지 못했으면, 불명성불(不名成佛)이라, 성불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번뇌를 못 끊었으면 성불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거지. 그럼 뭐냐. 번뇌를 다 끊고, 번뇌단진(煩惱斷盡)하고, 복지성경(福智成竟)이라야, 복과 지혜를 다 이루어야 자차이거(自此已去)로, 이때부터, 번뇌를 다 끊고 복을 다 이루어야만 그때부터, 그다음으로 명위구래성불(名為舊來成佛)이라, 이름을 옛부터 성불했다고 한다. 번뇌를 끊은 다음에라야 구래성불을 알아요. 번뇌를 끊기 전에는 옛부터 성불한 줄을 모른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걸 비유로 말하기를 꿈에서 깨어야만 꿈이 없었다는 걸 안다. 꿈을 꿀 때는 꿈이 없었다는 걸 모른다. 이렇게 가르쳐요. 무슨 소린지 참. 아니 꿈꿀 때는 몰라요. 자기가 꿈이 없었던 줄 몰라요. 꿈 분명히 있죠. 근데 꿈 깨고 나면 꿈은 없는 거야. 꿈은 없는 거예요. 꿈은 없는데 뭐냐. 평소에 의식이 이 눈을 통하지 않고 몸을 통하지 않고 저 홀로 일어나는 걸 꿈이라고 그래요. 이걸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그래요. 홀로 독, 머리 두. 홀로. 머리는 어조사고. 의식이 홀로 일어나는 걸 꿈이라고 하거든요. 평소에는 이 의식이 눈을 통해서 일어나고, 귀를 통해서 듣고, 몸을 통해서 움직이고 그러잖아요. 근데 꿈에서는 이 몸은 그대로 놔두고 의식만 이놈들이 따로 움직여요. 홀로. 그걸 꿈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평소에 생각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꿈은 별로 신경 쓸 거 없어요. 해몽하러 쫓아다닐 것도 없고요. 꿈이 뭐 어떻다고 속상할 것도 없고 그냥 꿈은 없는 거예요. 생각이 저 홀로 일어난 게 꿈이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생각이 저 홀로 뭐가 일어날지 모르거든요. 꿈을 어떻게 다스릴 수는 없어요. 지 홀로 일어났다, 지 홀로 또 사라져요. 그렇단 말이지. 그러니까 구래성불도 꿈과 같아서 꿈을 깼을 때 꿈이 없다는 걸 알듯이, 번뇌를 다 끊었을 때, <번뇌가 옛날부터 없었구나> 하는 걸 안다 이거지. 起此問意 若約十佛則 法界諸法 無非是佛 然此今日我等 盲冥凡夫 기차문의 약약십불즉 법계제법 무비시불 연차금일아등 맹명범부何能卽是十佛耶 如是難也하능즉시십불야 여시난야答意則 超情之法 友情卽是 若反情見 法界圓明 一切衆生 煩惱斷盡 답의즉 초정지법 반정즉시 약반정견 법계원명 일체중생 번뇌단진福智成竟 豈非佛耶 如是答也복지성경 기비불야 여시답야(叢髓錄 大記文. 韓佛全6,837中)(총수록 대기문. 한불전6,837중) 근데 의상스님의 훌륭한 제자분들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 후에 의상 스님 제자 중에서 대기라고 하는 기록을 남긴 분이 있는데, 그분이 여기에 대한 해석을 했어요. 기차문의(起此問意)는, 이 질문을 일으킨 뜻은 무슨 뜻이냐. 왜 번뇌가 있는데 옛부터 성불했다고 하느냐, 이런 질문이었죠. 그러니까 약약식불즉(若約十佛則), 만약 부처님의 10불 세계, 부처님의 10가지 불신 세계가 있는데, 그 10불 세계를 근거로 하면, 법계제법(法界諸法)이 무비시불(無非是佛)이라, 부처님의 십불에서 딱 보면 이 법계 온갖 일체 현상들이 부처님 아닌 게 없다. 그러니까 이게 한마음으로 우주를 다 보면, 우주가 한 마음 아닌 게 없다. 이거 이제 여기서 속아요. 이 눈으로 온갖 걸 보니까, 이 온갖 게 따로 있는 줄 알아요. 근데 여기에는 마음이 있어요. 마음이 없으면 볼 수가 없어. 그러면 저 보이는 세계는 색즉시공이고, 이것도 어렵네, 색이 공한 거예요. 이 보는 마음만 중간 법문한다고 해. 중간 법문. 신지 광명이 상주 법계라. 그 마음의 몸, 마음의 지혜의 광명이 법계에 항상 머문다. 그래서 그 마음은 물과 같고, 이 삼천대천 우주법계는 물속에 비추어진 그림자와 같다. 그래가지고 이 불교는 온갖 세상을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고 하거든요. 물 수자, 달 월자. <이 우주만법계가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럼 달은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모양들이고, 마음은 물이란 말이에요. 이게 요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물속에 비추어진 그림자가 이 손 모양이고, 이 몸 모양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원숭이는 물은 못 보고 물속에 비춰진 그림자만 보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미혹한 범부는 자기 마음 물은 못 보고, 마음에 비추어진 달 그림자만 본다. 그래서 달 건지려고 원숭이가 연못에 들어가서 빠지기만 하고, 달은 없어. 그래서 세상에 뭐가 있는 줄 알고 평생 구해봤댔자 죽는 순간에는 다 한낱 티끌뿐이고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내가 맨날 이런 소리하니까 그 소리 좀 하지 마라고 그러는데, 죽는 순간에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물속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들 며느리도 남는 게 없고, 내 몸도 남는 게 없고, 이게 원숭이가 달 건지려고 물에 들어갔지만 달은 안 건져져. 몸만 다 그냥 고생이단 말이죠. 그래서 세상 거 얻으려고 애를 썼지만, 몸만 늙어서 죽지 세상 건 뭐 얻어봤댔자 티끌이야. 그럼 “어쩌란 말이냐” 뭐 이렇게 이제 하는데, 그러니까 너무 욕심내지 말고 건강하게 살다 건강하게 죽어라. 건강하게 죽는다는 건 뭐냐. 죽음이 없는 걸 보고 죽어라. 건강하게 죽어라 그러잖아요. 그럼 건강하게 죽는 게 어떤 거야? 죽음이 없는 걸 보고 죽어. 그건 뭔 소리냐. 달이 물속에 없어져도 물은 영원하다. 죽음이 없는 거 보고 죽는 거지. 또 뭔 소린가 싶어가지고. 죽음이 없는 걸 보고 죽고, 삶이 없는 걸 보고 살고, 그러면 그걸 해인삼매(海印三昧)라 그래요. 바다에 비친 그림자를 보듯이 인생을 본다 이거죠. 그래서 삶이라는 건 이게 마음의 그림자인데, 삶이 없는 걸 보고 딱 살면 삶이 힘들지 않아요. 죽음이 없는 걸 보고 딱 죽으면 죽음이 괴롭지 않아. 그거 하라는 거죠. 그래가지고 이제 이 의상스님 제자가 법계 제법이 무비시불이라, 부처 아닌 게 없다. 이게 해인삼매거든요. 해인삼매. 근데 이제 범부들은 연이나 차 금일 아등(然此今日我等)은 우리들은 맹명본부(盲冥凡夫)라 그래. 이 참 이게 독특한 말을 썼는데, 맹명범부, 눈멀 맹자, 어두울 명자. 이 해인삼매, 자기 마음을 보는 데는 깜깜해가지고 그냥 맹인과 같이 어두운 중생들이다 이 말이죠. 맹명범부는 뭐냐. 하능즉시십불야(何能卽是十佛耶), 어찌 능이 십불을 감당하겠는가. 여시난야(如是難也)라, 이와 같이 질문을 했다. 그리고 밑에 것도 의상 스님이 대답한 말도 있는데 대답한 건 뭐냐. 번뇌를 끊지 아니하면은 옛부터 성불했다고 안 한다 이런 걸 이제 말했잖아요. 그러면 번뇌를 끊어서 성불하는 거는 뭐와 같으냐. 이거 복 짓기도 어렵고 참 복 받기도 어려우네. 이게 전부 복 짓고 복 받는 건데 지금 이 순간이. 그러면 번뇌를 끊고 바로 옛부터 성불했다는 걸 아는 방법은 뭐냐. 그거에 대해서 이 대기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뭐냐 이게. 답의즉(答意則), 대답한 뜻인즉, 초정지법(超情之法)이라고 했죠, 이 해인삼매는. 법계인과는 초정지법이라. 뛰어날 초, 감정 정. 감정은 생각인데, 이 감정 생각을 뛰어넘는 법이다. 감정 생각에서 벗어난 법이다. 근데 이걸 감정 생각으로 알려니까 어려운 거예요. 초정지법이라는 말을 썼어요. 감정과 생각을 다른 말로 하면 정식이라고 쓰는데, 감정 정, 의식 식, 이 정식을 초월한 법이다. 근데 이거는 어떻게 하면 그 정식을 초월한 법에 갈 수가 있느냐. 반정즉시(友情卽是)라, 정식을 돌이키면 바로 그거다. 반정. 반정이라고 옛날 임금 반대하는 데모를 반정 데모라고 그랬는데 그게 아니고, 돌이킬 반 감정 정. 그 감정을 돌이키면 바로 그게 초정지법이다. 감정을 초월하는 법이다. 그래서 모든 깨달음이라고 하는 건 반정이에요. 반정. 그럼 미혹함이라고 하는 건 뭐냐. 순정이요. 그 감정을 따라가는 거예요. 따라갈 순자 감정 정자. 감정을 따라가면 미혹이고, 감정을 돌이키면, 반정을 하면 그게 깨달음이에요. 반정즉시라. 감정을 돌이키면 바로 그것이다. 약 반정하야 견하면(若反情見), 만약 정식을 돌이켜서 딱 보면, 그다음 말이 법계가 원명(法界圓明)하야. 이 마음 본성이 둥글고 밝아서 우주에 그대로 꽉 차 있다. 이걸 둥글 원자, 밝을 명자, 원명이라고 그러거든요. 일체중생의 본래 마음이 우주법계에 둥글고 꽉 찼어, 둥글고 밝아. 그래가지고 일체중생이 번뇌는 하나도 없고, 번뇌를 다 끊었고, 복지를 성경(福智成竟)이라, 복과 지혜를 다 이루었다. 기비불야(豈非佛耶), 어찌 불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 생각 하나 딱 돌이키면 옛날부터 자기가 부처였다는 걸 알아요. 근데 생각이, 원숭이가 물에 있는 달 건지듯이, 밖으로 밖으로 계속 따라가는 순간에 계속 이 육도에 오르락내리락 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상스님 가르침 중에 반정성불이라, 반정하면 성불이요. 반정하면 깨달음을 이룬다. 감정을 하나 돌이키면. 그럼 반정하는 방법은 뭐냐. 기도하는 거지. <화엄성중> 하면 그 화음성중에 집중해서 감정이 다 안으로 돌아가게 돼요. 그래서 업장은 다 소멸이 되고, 거기서 지혜가 일어나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깨달음이 멀리 있나. 고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발심이 성불이기 때문에. 시작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게 이제 일승원교인데, 이렇게 가르치면 사람에 따라서 “정말로 그럴까요?” 이럴 수가 있어요. 이걸 까까중생이라 그래요. 까까중생. 그 말하면 “그게 그럴까요? 그게 그럴까요?” 이거 한도 없어. 그래서 이걸 의심하면 방법이 없어요. 뭐 인간 소통이라고 그러지, 소통은 믿어야 소통이 되지 몇 시간을 설명해도 그건 아니고요. 이러면 몇 시간 설명한 게 무용지물이요. 그러니까 이거 뭐 반정이 바로 성불이다. 순정이 바로 미혹이다 해 봤대자, “그게 그럴까요?” 하면 이건 다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다음을. 그러니까 이게 <화엄성중>해서 기도를 한 순간에 끊을 거 다 끊고 이룰 거 다 이뤘는데, 구래성불인데, 이거를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그냥 자기가 다 끊고 다 이룬 걸 모르는 상태로 그냥 하는 거예요. 하긴 한 거예요. 몰라도 한 거예요. 그래서 그전에 큰 스님들이 법문을 들어도, 다 알아야 듣는 게 아니다, 모르고 들어도 그게 법문이다. 비유로 말하면, 그전에는 한약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좋은 약을 모르고 먹어도 몸에 좋다. 이거 참. 어떻게 이게 한의사도 아닌데 약이 좋은 걸 어떻게 먹는 사람이 다 아냐. 근데 그 약을 알아서 먹는 건 아니에요. 몰라도 먹는 거예요. 먹고 나면 몸이 좋거든. 그러니까 이 법문을 들을 때 잘 이해가 안 돼도 까까 소리만 하지 말고, 그럴까, 안 그럴까, 그런 소리만 하지 말고 훌륭한 법문이다, 이렇게 의심을 내지 말고 불생의심하고 신수봉행(信受奉行)하라. 믿어 받아서 봉행을 하면 되는 거예요. 다 알 수는 없어도 신수봉행하는 가운데 그게 복이 되고 지혜가 되고, 이 복과 지혜가 이제 이루어져서 내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옛날부터 부처였다는 걸 그때 안다. 번뇌를 끊지 못했을 때는 옛날부터 부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게 의상스님의 가르침이에요. 꿈에서 깨어나야 꿈이 없는 줄 알지, 꿈을 꾸는 순간에는 꿈이 없는 줄 모르는 거와 같다. 그런데 제자들이 역시 그때도 마찬가지예요. 하나가 모든 것이라면, 일즉 다라고 하면, 이 중생신하고 제불신하고 상입상즉이니까 서로 들어가고서 서로 들어가니까, 이 몸이 제불신으로 들어가고 제불의 몸이 이 중생신으로 들어오고 하니까, 이 중생신이 바로 비로자나 십신불인데 비로자나 십신불이 바로 나의 몸이다. 그런데 이게, 그걸 알기가 참 어렵다 이 말이죠. 믿기는 믿는데 알기는 어려워. 이 몸이 바로 부처님 몸하고 같다. 중생신이 제불신이다. 表訓眞定等十餘德 從和尙所 學此印時 問云 不動吾身 卽是法표훈진정등십여덕 종화상소 학차인시 문운 부동오신 즉시법身自體之義 云何得見 於是和尙 卽以四句偈子 而答之云신자체지의 운하득견 어시화상 즉이사구게자 이답지운 諸根本我 一切法源心 語言大要宗 眞實善知識 제근본아 일체법원심 어언대요종 진실선지식 仍云汝等 當善用心耳 잉운여등 당선용심이表訓德 作五觀釋 一實相觀 五因緣觀 說頌曰표훈덕 작오관석 일실상관 오인연관 설송왈我是諸緣所成法 諸緣以我得成緣 是因緣觀 아시제연소송법 제연이아득성연 시인연관諸法本來不移動 能觀之心亦不起 是實相觀 제법본래불이동 능관지심역불기 시실상관 作此五觀 以呈和尙 和尙曰 是也 작차오관 이정화상 화상왈 시야 (叢髓錄卷上之一.韓佛全6,775中下) (총수록권상지일.한불전6,775중하) 그래서 이제 그 상수 제자 표훈스님, 진정스님 등 한 10분(表訓眞定等十餘德)이 종화상소(從和尙所)하야, 화상의 처소에 쫓아가서, 학차인시(學此印時)에, 이제 법계도인(法界圖印)이라고 법성계에 보면 그걸 그림으로, 이렇게 도장 형태로 돼 있어요. 그거 하나 가지고 의상스님은 이 법계인과를 가르쳤거든요. 그래서 그 법계도인을 배울 때에 문운(問云), 물어서 말하기를, 부동오신(不動吾身)이, 제법은 부동하야 본래적이라. 이게 이제 화엄경 가르침인데 일체만법이 이게 눈에 다 보이지만, 그 진실을 보고 나면 이게 생긴 것이 생긴 것이 아니다. 이걸 보는 것이 해인삼매다. 이걸 부동이라고 그래요.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이 몸이 생겨났는데, 이걸 반정으로 견하면 감정을 돌이켜서 보면, 생이 불생이라. 파도가 일어났는데 파도만 보지 않고 물을 보면 파도가 일어난 것도 역시 물이기 때문에 일어난 게 없다. 이게 해인삼매거든요. 그러니까 이 몸에서 이 몸이 나지 아니한 것을 딱 보는 게 그게 화엄 관찰이에요. 화엄경에서는 여러 가지 관법이 있는데, 모든 관법의 근원이 해인삼매예요. 그래가지고 몸을 부동의 오신이라 그래요. 움직이지 아니한 나의 몸이다. 그 움직인 건 생긴 건데, 이 몸이 생기지 아니한 내 몸이다. 이걸 무생오신. 이걸 보는 거예요. 이게 하나의 바다의 파도와 같아서 생기지 아니한 나의 몸이다. 그래서 이 부동오신이, 남이 없는 이 나의 몸이 즉시법신자체의(卽是法身自體之義)를, 법신 자체, 법의 몸 그 자체, 지금 내 몸이 법의 몸, 청정법신, 그 법신 자체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뭐라 그랬냐. 운화득견(云何得見)고,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옛날도 마찬가지예요. 옛날 사람들이라고 다 법문 듣는 대로 척척 알아챈 사람이 그렇게 많이 없어요. 한 둘이 있지. 한둘이 있는 거지. 그래서 “이 몸 자체가 그 법신 자체라고 하는 의미를 어떻게 아냐” 이래 의상스님한테 물었어요. 그러니까 어시화상(於是和尙)이, 의상 스님이 이 사구게자(四句偈子)로 답지운하되(而答之云), 네 가지 게송을 지어서 제자들한테 줬어요. 그 네 가지 게송이 뭐냐 하면, 이 의상 스님은 법성게 외에는 게송이 잘 보이질 않아요. 법성게는 이제 39 게송인데 법성게 외에는 게송이 안 보여. 근데 여기 보이는데 네 가지를 딱 줬어요. 첫 번째가 제연 근본은 나다(諸根本我). 모든 인연의 근본은 나다. 제연의 근본은 아라. 이 글도 참 깔끄러워, 의상스님은. 원효성사는 글이 훤출하거든요. 근데 의상스님은 아주 깔끄러워서, 잘 새겨야지 잘못하면 헛새겨요. 그래서 한문도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 돼요. 왜냐하면 했다면 고생해요. 했다면 고생해요. 이걸. 나도 옛날에 이렇게 못 새기고 달리 새겼어요. 고생하죠, 나도. 고생 안 할 수가 있나. 모든 인연의 근본은 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자체를 떠나서 십신은 없다, 이 얘기거든요. 제연의 근본은 나다. 제연의 근본은 아요, 일체의 법원은 마음이다(一切法源心). 또 일체법의 근원, 근원이라고 하는 거는 발원지와 같고, 일체법이라고 하는 건 바다와 같은데, 이 바다도 그렇게 물이 많이 있지만, 그 근원을 보면 아주 최초 발원지 이런 건 물 한 방울 내려놓는데요, 그게. 그런데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법의 근원이다. 원천수처럼. 그런 거고 어언은 대요정(語言大要宗)이라. 말, 중생의 이 어언, 말은 모든 일의 근본이고, 줄기다. 요종이라고 그러거든요. 중요할 요자, 종교란 종자. 종은 근본이라는 말이고 요는 줄기라는 말인데, 이 말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말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말을 딱 하면 하기 싫은 사람은 말을 안 되도록 해요. 공부 안 할 사람은 말부터 안 하려고 해요. 공부가 그래 되나. 안 되긴 왜 안 돼. 말만 고치면 공부가 이제 되거든. 내가 한다. 근데 거짓말로 말하면 또 안 돼요. 안 할 생각하고 말로만 그러면 안 되고, 아주 일심으로 그러니까 뭐 안 하는 사람은 말부터 안 해요. 안 하려고 해요. 하는 사람은 말부터 해요. 그래서 어언은 근본이고 줄기다. 그래서 진실선지식(眞實善知識)이다. 선지식은 삼세제불인데. 그래서 이제 인연의 근본은 나고, 일체법의 근원은 또 마음이고, 말은 모든 근본이고 줄기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가 갖추어졌을 때 진실선지식이다. 진실선지식은 삼세제불을 말하는 것이고,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다. 이런 게송을 딱 지어줬어요. 그러니까 그 제자들이 그걸 보고 그냥 해석한 게 아니라, 다섯 가지 관으로서 해석을 했는데, 이게 작오관석(作五觀釋)인데, 다섯 가지 관으로 해석을 지었어. 그런데 이제 오늘 다 못할 줄 알고, 5가지 다 안 적어오고, 첫 번째 하고 마지막 거 하고 세 가지는 생략하고 둘만 적어왔거든요. 공부 더 많이 할 분들은 그 책 소개가 여기 돼 있고 하니까 그거 찾아보면 되고 하니까. 참 좋은 건데. 이게 근데 그 가운데 첫 번째가 이 몸을 딱 보면, 이 몸은 인연으로 돼 있다. 인연을 깨달으면 아집이 사라져요. 아집 없이 죽으면 죽음이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아요. 죽음이 두려운 건 아집 때문에 그래요. 풀잎이 생겼다 없어질 때, 나뭇잎이 피었다 떨어질 때, 걔들이 발버둥 치지 않거든요. 걔들은 나라는 집착을 안 가지고 있어. 그래서 필 때나 질 때나 다름이 없어요. 근데 범부는 이걸 인연법인데, 이걸 나라고 집착을 해요. 나는 없고 인연은 있다. 늙는 것도 인연이고, 태어나는 것도 인연이에요. 여러 가지가 뭉쳐서 된 거예요. 그러니까 죽을 때도 인연이니까 인연법을 딱 보면 이렇게 하나하나가 가는구나, 그거 얼마나 좋아. 그래서 죽을 때 뭐 빨리 죽으려고 할 것도 없고요. 자는 잠에 죽는다고 그거 할 거 없어. 왜 자는 잠에 죽어, 억울하게. 죽는 거 딱 하나하나 보고 죽어야지. 그러니까 죽음을 피할 생각을 하지 말고 자세히 관찰을 하라. 그럼 이게 전부 인연법이기 때문에, 몸이 죽는 게 아니라 인연이 지금 나타나는 거다. 죽는 인연, 사는 인연 그런 거예요. 인연관이라는 게 있는데 인연관이 뭐냐. 아시제연소송법(我是諸緣所成法)이라, 나라고 하는 것은,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연, 인연이란 뭐냐. 여기 혈액도 있고, 체온도 있고, 호흡도 있고, 뼈마디도 있고, 그러는 게 이게 전부 지수화풍이라고 하거든요. 지수 화풍이 모여서 내 몸을 이루었다 이거죠. 지수화풍. 나는 지수화풍이 소송법, 이룬 것이다. 지수화풍이 모였다가 지수화풍이 흩어지니까 그 인연법만 딱 관찰하면 공포감 없어요. 이것이 바로 무아현상이라는 거죠. 인연은 무아다. 그냥 니가 없다 그러면 이게 통할 수가 있나. 그 인연법을 관찰하면 인연만 있고, 나는 없다는 걸 저절로 알게 되죠. 그리고 제연은 이아로 득성연(諸緣以我得成緣)이라, 모든 인연은 나로서 인연을 이룬다 그랬어요. 인연을 어떻게 이루냐. 물은 내 몸에 들어와서 피가 되고요, 물은. 또 따뜻한 공기는 내 몸에 들어와서 체온이 되요. 그리고 저 흙 같은 것은 내 몸에 들어와서 근골이 되요. 뼈가 된단 말이죠. 이렇게 제연은 이아로 득성연이라, 모든 인연은 나로서 인연을 이룸을 얻는다. 그러니까 이거 인연관을 딱 봐, 이 게송 넷을 인연관으로 해석을 했다, 이거예요. 그다음에 이제 제일 먼저 나온 게 이제 실상관(實相觀)인데, 실상관이라는 건 이제 뭐냐. 제법은 본래로 불이동(諸法本來不移動)이라, 제법은 이거 인연이니까 인연은 그 특징이 자성이 없어요. 자체성이 없어, 인연은 특징이. 전부 이타위성이에요. 다른 것으로서 자기를 삼는 게 인연이에요. 물도 자체가 없고, 나무도 자체가 없고, 흙도 자체가 없고, 이 몸도 자체가 없고. 그래서 제법은 본래로 인연인데, 인연은 연성은 무성이라. 인연의 성격은 본래 자성이 없다. 그래서 연생은 무생이라, 인연으로 난 건 남이 없다. 제법은 본래로 불이동(諸法本來不移動)이라. 이동이라는 건 난단 말인데, 또 사라진단 말인데, 인연은 본래 나고 죽는 게 아니고, 나도 난 게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다. 이거란 말이죠. 진짜 이 이건 강원에서도 잘 안 하는 법문인데 정월 초에 이거 복 비는 법문을 이렇게 하고 있네. 왜냐하면 이런 엄청난 법이 화엄성중 그 한마디에 다 이루어지는 묘법이란 말이에요. 이게. 무량법이 일성묘법이라. 한 소리의 묘한 법이다. 이게 법계인과라는 거예요. 문자를 쓰니까 이걸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량대법 일성묘법, 무량대의 큰 법이 한 소리의 오묘한 법이다. 그래가지고 능관지심도 역불기(能觀之心亦不起)라, 능관지심도, 지금 이 이건 마음이고 뭐 인연은 어떤 거고 뭐를 듣고 보고 하는 게 이게 능히 보는 마음인데, 이 보는 마음도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난 게 아니다. 마음도 일어난 게 아니고 물질도 일어난 게 아니다. 이게 실상이란 말이에요. 그 실상관(實相觀)을 딱 하면 의상스님의 사구게의 가르침을 환히 통달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해가지고 작차오관(作此五觀)하야, 이 오관을 지어서 이정화상(以呈和尙)하니, 그것으로 의상스님께 바치니, 화상왈(和尙曰), 의상 스님이 가로되, 시야(是也)라, 옳다 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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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기도] 2월 4일 입춘기도 회향 법문
회주 계호스님 2024-02-04
안녕하세요. 오늘은 굉장히 좋은 날이죠. 입춘입니다. 보통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이라 그래요. 입이라는 것은 <오신다> 이런 뜻이에요. 온다, 올 래자(來)의 뜻이고, 입춘은 <봄이 옵니다>라는 뜻이에요. 봄이 오니까 우리가 봄을 맞이해야 되겠죠. 그럼 봄을 맞이하기 전에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물론 집안 청소도 열심히 해야 되겠고, 본인의 마음가짐도 좀 단정하게 해야 되겠죠. 오늘 도량에서 보니 어제부터 도량을 잘 정리해서 입춘을 맞이하더라고요.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할 때, 여기서 대길의 길자도 길하다는 뜻이고 복이라는 뜻이에요. 길자도 복이고, 건양다경(建陽多慶)의 양자는 봄 햇살인데 이것도 복 복자의 뜻이에요. 그리고 다경도 다 복자의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입춘을 맞이해서 봄만 오는 것이 아니라 복도 같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입춘대길하면은 <봄이 오시니까 큰 복으로 오십시오.>입니다. 그러니까 봄만 오는 것이 아니고 복도 같이 오니까, 봄은 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봄을 맞이해야 된다 이런 의미에요. 그전에 종범 스님께서 아주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건양다경에서 건양하면 이 건자는 세울 건자인데, 이르다, 온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양의 절기가 오십니다> 이런 뜻이에요. 양의 절기는 따뜻한 기운이 오는 거고, 다경하면 복돼야 경사스럽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양의 절기가 오십니다. 많은 복으로 오십시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입춘대길 하면, <입춘이 되니까 아주 길한 일만 있겠구나> 하는 의미도 되지만, <봄만 오는 것이 아니라 복도 같이 온다> 이런 의미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입춘날 완전한 새해를 맞는 거예요. 새해에 새 마음은 자기 마음에서 오는 겁니다. 어제 마음은 새 마음이 아니고, 우리가 보통 새 마음 하면 마음을 새롭게 가진다 이런 의미예요. 우리가 네 번의 설날을 맞이한다고 그랬죠. 첫 번째는 동지, 작은 설이에요. 이건 절기의 동지고, 그다음에 신정 있고 구정 있죠. 그다음에 마지막에 입춘이 있어요. 그래서 입춘이라고 할 때, 음양의 입춘인데, 하지부터 동지까지는 음기가 가득하고, 그다음에 동지부터 하지까지는 양기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네 번의 새해를 맞는데 세 번까지 왔죠. 남은 것은 구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송구영신할 때, 송구계묘 영신갑진이에요. 갑진하면은 청룡이에요. 그것도 아주 푸른 용인데 이거는 날아오르는 격이고, 용이 하늘에 날아오르니까 얼마나 좋아요. 용꿈만 꿨다 해도 좋겠죠. 용꿈을 꾸듯이 우리는 항상 큰 꿈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그래서 <신화엄경론>에 보면 보현보살이 동방에 위치하기 때문에 장남이 되고, 머리가 되고. 머리라는 건 꼭대기예요. 그다음에 시초가 되고, 청룡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봄의 생명이 되고, 법을 건립하는 단초가 된다 그랬어요. 그래서 <세간의 부처님 법은 다 동방을 취해서 첫머리를 삼는다>라는 얘기가 있어요. 동방에 해가 떠서 온 세상의 만물을 다 비추면, 일체가 다 명료해져요. 밝아지기 때문에. 동방은 머리가 되고 해가 뜨는 첫머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현보살은 실천과 행이 으뜸이에요. 그래서 장남이 되는 거예요. 장남들은 차남하고 막내하고 조금 질이 다르죠. 왜냐하면 가족을 부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도 보현보살의 실천이 중요한 거예요. 아무리 아는 게 많아도 그건 세지변총(世智辯聰)이지 실천이 아닙니다. 실천은 진리를 증득하는 유일한 검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실천을 해야 되기 때문에, 용의 해가 중요한 거예요. 갑진년 새해를 맞아서 보현보살의 실천행으로 서로 다 화합해야 됩니다. 출가자나 재가자들이나 출세간이나 세간이 함께 어우러져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부처님을 전하는 데 노력한다면 여러분들은 청룡의 우두머리가 되고, 청룡의 장남이 되어야 해요. ‘올해는 정말 잘 된다.’는 마음을 모두가 가지면 적선공덕(積善功德)을 쌓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은 생각 가지고 좋은 마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셔야지, 맨날 누구 탓하면 안 돼요. 탓하다 보면 내가 탓하는 사람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좋은 마음 갖고 항상 좋은 생각 가지고 옆에 사람 도와줄 생각하는 보현보살의 행을 하고 수행정진하는 해가 되도록 합시다. 보통 입춘은 양력으로 2월 4일입니다. 음력으로 정월달에 들기도 하고 섣달에 들기도 해요. 오늘은 음력으로 12월 25일, 섣달 스무닷세인데, 정월로 봅니다. 예전에 입춘 되면은 세 가지 징후가 나타난다고 했어요, 동풍이 불어서 언 땅을 녹이고, 그다음에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물고기가 얼음 밑으로 살살 다닌다고 합니다. 사는데 무탈해야 돼요. 탈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예요. 장애가 없어야 된다는 얘기예요. 항상 장애는 내가 만들어요. 입춘에 행해지는 민속풍습이 있죠. 봄을 맞이하는 뜻으로 대궐에서는 신하들에게 조그마한 춘첩자(春帖子)를 줘서 춘련(春聯)을 붙이기도 하는데, 보통 대구(對句)를 넣어가지고, <입춘대길 불심무구>, <입춘대길 적선공덕>,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등을 붙이고, 불설소재길상다라니, 광명진언도 다 좋은 구절이 됩니다. 그래서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기도 하고. 날씨가 하도 추우면 입춘방(立春榜)을 보살님들이 제대로 안 붙이고 거꾸로 붙여서 날씨가 굉장히 춥다고 합니다. 2월달에도 독 깨진다 그러잖아요. 3, 4월에도 눈이 와요. 그러니까 조심하고, 항상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수행 정진하면은 아무 탈이 없이 무탈하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살면 아무 장애가 없는 거예요. 기도를 정법으로 안 하다 보니까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하냐. 이 기도한다는 것은 안개에 이 내 옷이 스며든다는 의미입니다. 기도라는 건 근수(勤修)라고 그랬어요. 부지런히 닦는다. 복과 지혜의 자비를 닦아야 돼요. 그래야지만 나한테 복과 지혜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또 <입춘대길 건양다경>에서, 이 건양이라는 거는 고종의 연호가 건양이라 그래서, <나라가 좀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번에 큰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건양이라는 거는 양도 복의 뜻이다, 세운다, 복에 이르른다, 이런 뜻도 있다고 해주시니까, 이거 두 가지 의미가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도 같이 적어놨어요. 그다음에 수여산 부여해 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壽如山 富如海 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 수명은 산처럼 수명 장수하고, 바다처럼 부유해지기를 바라고, 또 땅을 쓸면 모래가 나오는 게 아니라 황금이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다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복을 얘기할 때 오복, 삼복 그러죠. 오복은 처음에는 수명 장수, 그다음에 부자, 그다음에는 건강한 거, 강녕(康寧)이에요. 수 수명, 부 재산, 강녕 건강. 그다음에 유호덕(攸好德) 하면은 인복이 있어야 된다 얘기예요. 그다음에 고종명(考終命), 그냥 명을 맞춰서 잘 돌아가셔야 돼요. 90세에 돌아가시든지, 80에 돌아가는 건 상관없는데, 20세나 30세에 비명횡사하면 조금 안 좋은 의미죠. 그래서 목숨도 제 명대로 사는 게 고종명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맨날 그러죠. ‘잠자는 듯이 갔으면 좋겠다.’ 그것도 잘 지어야 잘 갈 수 있어요. 또 삼복도 있어요. 삼복은 신복(身福), 몸 건강이 신복이에요. 그래서 몸 신자, 복 복자고, 그다음에 재복(財福)은 재물이에요. 그다음에 인복(人福)은 인덕이에요. 그걸 삼덕이라 그래요. 보통 오복, 삼복, 만복도 있어요. 만 가지 복을 만복이라 하고, 천복, 백복, 만복 그러는데, 이거는 복이 많이 생기는 걸 백복, 천복, 만복이라 그래요. 천 가지, 백 가지, 만 가지가 아니고, 많다의 의미의 만이라 그래요. 오만 가지 할 때 오만 가지가 다 많다는 의미로 쓰죠. “저 사람은 참 복이 많다. 저 사람 참 인덕이 좋다.” 이렇게 하는 거는 그 사람이 편안하기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지칭을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살아가는데 편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복을 지으면서 자비와 지혜를 같이 닦아야 하므로, 자비는 지혜의 열매고, 지혜는 자비의 씨앗이고 그다음에 자비와 지혜의 거름은 원력이에요. 원력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지혜는 친절로 나타나고 자비는 미소로 표현한다. 자비와 지혜와 원력이 함께하는 세상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부지런히 닦아야 돼요. 우리가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돼야지 큰 원이 이루어질 수 있지, 원도 조그맣게 ‘우리 가정만 좀 잘 살게 해주십시오’하면 그거는 조그마한 원이지 큰 대원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세상이 다 어떻게 됐어요? 평화롭지 못하잖아요. 그것도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장애물도 될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서 기후 조건도 이상하지요. 내년에는 더 덥다 그래요. 올해는 눈도 가끔 가끔씩 왔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염불을 하든지, 주력을 하든지, 그다음에 경을 독송한다든지 참선을 한다든지 그중에 한 가지만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한 가지만 해도, 지옥고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요. 염념이 보리심하면은 걸음걸음마다 부처님이 나타난다고 그랬어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에 부처님이 나타나고 부처님이 안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행은 철저히 하고 계율이 그대로 위의예요. 이계위사(以戒爲師)라고 부처님 안 계실 때는 계로서 스승을 삼으라고 그랬거든요. 윤리도덕이 그대로 계율이에요.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술 먹지 말라, 뭐 하지 말라, 뭐 하지 말라 많잖아요. 오계, 십계가 다 그런 일상생활의 윤리 도덕이에요. 그것만 잘 지켜도 그 사람은 정말 청정율사가 아니더라도 수행하는 진면목의 스님이에요. 누가 가르쳐주는 건 아니에요. 자기 스스로 이걸 잘 닦는 거예요. 진관사가 왜 이렇게 맑은지 모르시죠? 평생 기도만 하다 보니까. 사람, 사람, 걸음걸음마다 맨날 하는 게 신묘장구대다라니, 아니면 법화경 독송이잖아요. 그래서 법화경 독송하면 무량공덕이 생기고, 수륙재를 하다 보니까 맑아야 되는 거예요. 도량이 맑지 않으면 큰 스님이 들어오시다가도 “도량이 맑지 못하다.”고 다시 돌아가세요. 그런데, 보는 사람마다 왜 이렇게 도량이 맑으냐하면 기도하는 사람, 천일기도가 안 끊어져서 그래요. 그러니까 보살님들이 마음속으로 딴 생각 안 하잖아요. 계속 기도를 해서 염력을 두니까 주력도 끝까지 하시니까 편안한 거예요. 한 가지 일관하면은, 한 가지 잘하면 다 통하는 거예요. 하나 통하면 다 통한다는 거, 궁하면 통해요. 내가 뭐가 안 되는데, 가만히 보면은 융통성이 없다가도 뭔가 딱 지혜로우면은 그 답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살님이 안 해서 못하는 거지, 불가능이란 건 없다 그랬잖아요. 그냥 열심히 하고 이렇게 입춘날 맞이해서 우리는 잘 해야 되겠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내가 한 가지만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건 없다’라고 말씀하시듯이 열심히 하고, 마음을 잘 다스려 가지고 살아가는 데 남한테 해를 입히지 않는 그런 사람이 돼야 되는 거예요. 맨날 이상하게 딴소리만 하고, 바른 소리를 하고 바른 말을 해야 되는데 자꾸만 엉뚱한 소리 하다 보니까 그게 이상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부처님의 진리를 굳게 믿고, 그다음에 정법을 바르게 배워야 돼요. 사법이 아닌 정법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사람 몸 받고 그다음에 정법 만난 것도 다 이게 우리들의 복이에요. 그다음에 부처님의 정도를 바르게 행하고, 그다음에 부처님의 정각을 바르게 이루는 한 해가 돼야 되겠죠.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 그래요. 습관을 잘 들여야 되는데, 세속의 습관이 안 버려지면 그대로 속인 같아요. 여러분들은 세속에 살면서도 부처님같이 살면 그대로 도인이에요. 유명한 거사들이 있는데 마을에 살면서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분들을 거사라고 지칭해요. 인도에는 유마거사, 중국에는 방거사, 우리나라는 부설거사가 있어요. 부설거사 그 집 가족은요, 다 부처님이에요, 그대로. 딸 아들까지 그대로 부처님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같이 살면서 부처님처럼 행동하면서 그렇게 살면 아무 하자도 없고 다 잘 되는 거예요. 올해 청룡의 해니까 잘 돼야 되겠죠. 장남 같이 살고, 머리 같이 살고, 꼬리가 되지 말고 항상 으뜸이 돼야 되고, 남을 보살피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되고. 오늘 불설소재길상다라니 몇 번 하셨어요? 삼칠번(21번) 했죠. 그것만 해도 공덕이 다 되는 거예요. 한 번만 해도 되는데. 그러니까 불설소재길상다라니 했죠,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하셨죠, 광명진언을 했죠, 다 했잖아요. 아니 우리 아버지 법회도 맨날 광명진언 하잖아요. 금강경 독송할 때도 하고. 그리고 적선공덕 가행정신(積善功德 加行精進)이라 그러죠. 그다음에 <입춘대길 불심무구> 이런 것도 있고. 정조 임금님 때는요, 부모은중경에 나오는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를 인쇄해 나눠줘가지고 이거를 대문에 붙이기도 했다 그랬어요. 부모은중경은 용주사에서 부모은중경을 많이 해서, 부모은중경 경판도 거기 다 모셔져 있어요.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하면 부모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진언이에요. 혹시 부모님께 불손했다거나 부모님께 좀 무례하게 했던 사람은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 이걸 좀 많이 해보세요. 그러면 부모님이 저승에서라도 “아유 우리 스님, 스님 됐으니까 좀 도와드려야 되겠다. 아유 우리 보살, 기도를 잘 하니까 내가 좀 도와주겠다” 하면, 안 하고 싶은데도 자꾸 기도하는 마음을 내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나도록 해야 되겠죠. 그래서 진관사 신도들을 제가 제일 좋아하잖아요. 왜 좋아하느냐. 기도를 열심히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승 가서 염라대왕님이 ‘뭐 하다 왔느냐?’ 물으면 ‘진관사에서 기도만 하고 왔습니다’ 하면 무사통과예요. ‘호박떡을 좋아하는데 호박떡을 못 했습니다’ 하면 ‘아유, 괜찮아요. 내가 봐줄 테니까 잘 가라’고 무사통과해요. 왜냐하면 기도를 너무 열심히 잘해서. 그래서 항상 기도하는 우리가 돼야 되고, 기도하는 주력하는 스님이 돼야 되고, 주력하는 보살이 돼야 되고, 그다음에 경을 독송하는 보살이 되야 해요. 금강경 독송해도 되고, 법화경 독송해도 되고, 능강경 독송해도 되고, 어떤 경이든지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경으로, 지장경 해도 되는 거예요. 안 된다는 건 없어요. 이 세상에. 정해진 법은 없어요. 수학 공식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하면 다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뒤에 보면 아홉 차리라는 게 있죠. 맡은 바에 따라서 9번 일을 되풀이해서 하면 한 해 동안 복을 받는다고 했어요. 글방에 다니는 애들은 옛날에 천자문을 9번씩 읽었다 그래요. 또는 나무를 아홉 바구니를 하고, 다른 사람들은 빨래를 9가지를 한다든지, 길쌈을 아홉 바디를 하고, 실을 감더라도 아홉 꾸리를 감고, 밥을 먹어도 9번을 먹는데, 많이씩 안 먹고 한 숟갈 먹다가 조금 이따 또 한 숟갈 먹고, 조금 이따 한 숟갈 먹도록, 그러다 보면 아홉 그릇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홉수를 그렇게 좋아해요. 중국 사람들은 팔자를 좋아해요. 그 사람들은 팔 하면 그게 벌써 복이 온다 해서 돈이라 생각해요. 우리는 구자를 좋아해가지고 아홉자는 양수로 보기 때문에 열심히 살라는 그런 교훈적인 의미도 있어요. 세시 절기하고 명절이 달라요. 정월보름이라든지 추석이라든지 이거는 명절이고, 입춘 그다음에 우수, 경칩 이런 거는 세시 절기예요. 그러면 입춘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이 뭐예요? 소한, 대한, 대한이 마지막이죠. 소한, 대한 끝나면 또다시 입춘으로 돌아와요. 그래서 일 년에 한 달에 두 번씩 초에 들 때도 있고 중간에 들 때도 있고 해서 한 달에 두 번씩 들기 때문에 12 곱하기 2하면은 24절기예요. 아시겠죠? 그러니까 열심히 하고, 좋은 일을, 적선공덕을 하면 액을 면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다리 없을 때, 길 없는데 다리 놔준다든지, 또 우물 파서 많은 사람들에게 급수공덕 한다든지, 그다음에 밥을 지어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공양을 시킨다든지 이것도 좋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공양을 많이 하는 마음을 내시면 좋아요. 올해는 청룡의 해니까 뭐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다 같이 부처님 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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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1월11일 음력 12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01-11
안녕하십니까? 신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동안 제가 건강이 좀 못 받쳐줘서, 진관사 초하루 법회에 잘 못 나오다가, 이제 계묘년 섣달 초하루를 맞이해서 오랜만에 나오게 됐습니다. 오늘 법문의 제목은 <자기미래불(自己未來佛)>, 자기 미래에 이룰 미래불, 이런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불교는 중간 목적이 있고, 궁극 목적이 있는데, 중간 목적은 현증수복(現增壽福)하고, 현세의 수명과 복덕을 이루고, 내세에 극락세계 왕생하는 걸 이루고, 이게 중간 목적이에요. 구경목적은 구경성불해서 전법도생(傳法度生)하는 거, 법을 전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아주 궁극적인 목적이거든요. 그러면 성불을 못한 것을 범부중생이라고 그러는데, 또 성불을 한 분을 삼세제불이라 그래요. 성불을 하면 삼세제불이고, 성불을 못한 분들을 범부중생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럼 범부중생과 삼세제불의 차이점이 뭐냐. 凡夫 : 地水火風 皮肉筋骨身 見聞覺知 受想行識心범부 : 지수화풍 피육근골신 견문각지 수상행식심 生老病死 憂悲苦惱相 六道出沒 不息造業行 생로병사 우비고뇌상 육도출몰 불식조업행 범부중생(凡夫衆生)은요, 이 범위가 아주 좁아요. 범부중생이 알고 있는 몸이라는 거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된 이 육신, 지수화풍과 피육근골신(皮肉筋骨身), 피부와 근육과 골절 이걸 내 몸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범부중생이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거는 견문각지심(見聞覺知), 보고, 뭐 이게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런 걸 이제 마음이라고 알고 있고, 또 수상행식심(受想行識心), 뭐 이제 감수성을 느끼고, 상상을 하고, 행동을 하고, 인식하는 이런 걸 마음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평상시에 어떤 걸 느끼느냐면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를 느껴요. 죽는 거 느끼고, 늙는 거 느끼고, 이렇게 뭐 태어나는 거 이런 거 느끼고, 또 근심 걱정이 많아, 그 생로병사 도중에. 그런 형상이 있고. 그리고 이것이 한 생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 육도출몰(六道出沒)을 해요. 이제 삼선도·삼악도가 있는데, 삼선도는 육도 중에서 좀 좋은 데고, 삼악도는 나쁜 덴데, 나쁜 데로 떨어졌다가 좋은 데로 올라갔다가 나쁜 데로 떨어졌다 좋은 데로 올라갔다, 이게 출몰을 한단 말이에요. 나왔다, 들어갔다. 근데 이게 쉬지를 않아요. 불식조업행(不息造業行)이라, 그런 업을 지어가는 거를 끝내지 않고 계속한다. 이걸 범부중생이라 그래요, 범부중생. 諸佛 : 三佛圓融 佛身無礙 身智光明 普照法界제불 : 삼불원융 불신무애 신지광명 보조법계 佛刹淨土 莊嚴具足 劫外常住 受用無盡 불찰정토 장엄구족 겁외상주 수용무진 그러면 삼세제불(三世諸佛)은 뭐냐? 이제 부처님에게는 삼불이 있다. 법신불(法身佛)·보신불(報身佛)·화신불(化身佛), 삼불이 있는데, 이거를 부모가 주는 것도 아니고, 스승이 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깨닫는 부처예요, 이거는. 깨달음으로 나타나는 게 부처님인데, 이 부처님 중에는 법신불·보신불·화신불이 있는데, 이 법신불을 어떻게 깨닫냐. 법신불은 정각을 통해서 깨달아요. 정각.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다. 정각은 바르게 깨달은 건데, 바르게 뭘 깨달았느냐. 법신을 깨달아요. 정각은 법신이에요. 법신을 어떻게 깨닫냐. 그 생로병사, 우비고뇌, 견문각지, 수상행식심을 딱 맑히면, 그 맑아지는 순간에 본래 자기 몸을 알게 돼요. 그래서 그 깨달음으로 아는 걸 요달(了達)이라고 그러는데, 알 료자하고 통달할 달자가 있어요. 그래서 법신은 요달로 정각을 한다. 그러면 그 요달로 정각하는 몸이 뭐냐. 나의 본래 신이에요. 나의 본래 신. 그래서 정각으로 법신을 깨닫는다. 그러면 깨닫고 나면 어떻게 되냐. 법신을 깨닫는 순간에 이 견문각지, 수상행식, 일체번뇌 생각들이 지혜로 바뀌어요. 그래서 의식이 지혜가 되는 거예요. 의식과 지혜가 있는데, 의식은 범부중생의 마음이고, 지혜는 삼세제불의 마음인데, 의식이 지혜로 확 바뀌어버려요. 그래서 이 의식이 지혜로 바뀌는 거를 출현(出現)이라 그래요, 출현. 날 출자, 나타날 현자.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 세주묘엄품은 정각이라고 그랬고, 여래출현품에서는 출현이라고 그랬어요. 그러면 출현하는 건 뭐냐? 지혜가 출현하는 건데 지혜가 왜 출현하느냐. 그 법신을 바르게 깨달은 공덕으로, 이걸 정각 공덕이라고 그래요. 법신을 바르게 깨달은 공덕으로 대지(大智) 출현이라, 큰 지혜가 나타난다. 그래서 법신을 깨달은 보답으로 나타난 부처님 몸이라고 그래서 그걸 보신이라고 그래요. 보신. 그래서 보신은 출현으로 나타난다. 그럼 법신, 보신을 갖춘 부처님은 그다음에 뭘 하냐. 백억 화신을 나타내는데, 백억 화신은 뭐냐. 응화(應化)라고 응화현이라, 출현이 아니고 백억 화신은 응화라. 참여할 응자, 변화할 화자인데, 응화신. 그 응화신은 뭐냐 하면은 물속의 달과 같다. 수월, 수월이라. 물속의 달이라는 건 뭐냐. 물속에 있는 달은 맑은 물이 있을 때는 나타나고, 맑은 물이 없으면 안 나타나요. 그래서 인연이 되면 나타나고 인연이 안 되면 안 나타나고, 그래가지고 이 응화신은 비신현신(非身現身)이라고, 몸이 없는데 몸을 나타낸다. 이게 이제 부처님의 삼신이에요, 삼신인데. 이 범부중생은 몸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피육근골신, 이걸 내 몸이라고 알고 있는 거예요. 피육근골신. 그리고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전부 밖에 거 생각하는 것만 마음이라고 알고 있어요. 의식의 대상은 밖의 사물이에요. 자기 몸도 마음 밖에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보이는 게 생로병사고, 느끼는 게 우비고뇌예요. 근심, 걱정, 슬픔. 여기서 본래 자기법신불을 딱 깨달으면 어떻게 되냐. 석문의범 다비편에 그런 게송이 있는데, 법신은 변만백억계(法身遍滿百億界)라. 법신은 이게 끝이 없어요. 그래서 100억 세계 온 우주법계에 가득하다. 두루이 가득하다. 그게 일체중생의 본래 몸이에요. 그다음에 보광광명은 조인천(照人天)이라, 법신을 깨달으면 그 지혜 광명이 나와요. 그 지혜광명이 넓게 비추어져가지고, 인간과 천상 세계를 다 비춘다. 이게 이제 보신불이고, 앞에 법신변만백억계 하는 건 법신불이고, 응물현형(應物現形)은 담저월(潭底月)이라. 응물해서, 사물에 응해서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연못 물속에 비치는 달과 같다. 이건 화신불이에요. 이것이 이제 삼세제불이다 말이죠. 그래가지고 체원(體圓) 법신·보신·화신이 그 몸이 원만해. 그래서 앉는 데마다 보련대(寶蓮臺)라. 보배 자리에 앉고 연꽃과 같은 청정한 자리에 앉는다. 이게 이제 부처님 세계거든요. 그래서 이 범부 세계하고 부처님 세계하고는 완전히 달라서, 이게 이제 범부중생세계는 좋았다가 나빠지니까 좋은 것 자체가 얼마 못 가요. 이게 문제에요. 얼굴 잘난 게 나쁜 거 아닌데, 그 얼굴이 얼마 안 간다니까요. 누구는 젊을 때 얼굴 없었나. 그리고 몸기운 좋은 게 얼마 안 가. 그 기운 좋은 게 얼마 안 간다고요, 그게. 또 부자도 얼마 안 가고, 명예도 얼마 안 가고. 그래서 알고 보면 금방 생겼다 없어지는 것이 세상 만물이니까, 이걸 알고 보면 구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세상에서는. 구해봐야 없어지니까. 그래서 세상 이치를 알고 나면 세상에서 구할 게 없다. 이걸 뭐로 비유했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어느 집을 가만히 보니까 뭐 좋은 게 많은 것 같아. 그래서 그 집에 가서 그 안에 있는 거 전부 훔쳐보겠다고 그냥 온갖 고생을 다 해서 그 방에 딱 들어가니까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적입공실(賊入空室)이라, 도적이 빈방에 들어갔다. 없는데 어떡해요? 훔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없어졌다. 이게 이제 인생 철든 사람의 마음인데, 처음에는 뭐 세상 살면 좋은 게 많은 것 같은데 가만히 살아보니까 좋은 게 없거든. 뭐 좋았던 한 세상 어쩌고 그러는데, 그게 금방 꿈같이 지나가 버리고 하나도 좋은 게 없더라. 그것이 도둑이 물건 훔치러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없는 걸 느끼는 거와 똑같다. 그래서 훔칠 마음 전혀 없어요. 그건 세상에서 뭘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 그러면 뭐냐. 본래 자기를 찾는 거, 그게 깨달음이거든요. 세상 것을 구해봤대자 허망하니까 본래 자기를 찾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법신·보신·화신이라 그래요. 법신은 정각으로 이루고, 보신은 광명으로 이루어요. 그래서 보방광명(普放光明)이요. 광명신 또 그런 정각신, 또 수월신 물에 비친 달과 같은 몸이다. 이런 건데 이렇게 돼서 이제 삼신이 원융(圓融)하고 불신이 걸림이 없어서 신지광명이 보조법계(身智光明 普照法界)라. 신은 삼신불을 말하고, 지는 이제 생각이 바뀌면 네 가지 지혜가 나타나는데 그게 보신불이에요. 네 가지 지혜는 이제 가르치는 게 있어요. 그거는 다 말 안 해도 되고. 법계를 두루 해요. 이게 삼신사지(三身四智), 이걸 부처라고 그래요. 삼신사지. 지혜가 보신불인데 지혜는 정각 공덕으로 나와. 그래가지고 불찰정토(佛刹淨土). 이 법신 보신이 딱 이루어지면 그 이루어진 공간이 부처님 나라라, 불찰이라고 그러고, 나쁜 게 하나도 없어서 그걸 정토라 그래요. 깨달으면 그게 불찰이고 그게 정토요. 장엄이 구족(莊嚴具足)하다고 모자라는 게 하나도 없어. 장엄이 다 갖춰졌어요. 그리고 거기서 계시는 부처님은 세월이 없어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어. 겁외상주(劫外常住)여. 세월 밖에 항상 머물러. 말만 들어도 진짜 좋다. 이게 다 늙었네, 젊었네. 이게 세월 속에서 나타나는 거잖아요. 늙고 젊음이 없어. 그래가지고 뭐냐. 수용이 무진이라(受用無盡), 그 받아쓰고 즐거움이 끝이 없다. 自己未來佛 자기미래불①問 自未來佛 還化自現在者 以何文知乎 答 瓔珞經 第 八地菩薩云 “自見 己身當果諸佛 摩頂說法” 문 자미래불 환화자현재자 이하문지호 답 영락경 제 팔지보살운 “ 자견 기신당과제불 마정설법” (보살영락본엽경권하. 대정장제24권, 1018상) 故卽聖說 炳然可知 고즉성설 병연가지 이게 이제 부처님 세계거든요. 그런데 이 미혹범부에서 삼세제불로 가는 분들을 보살이라고 그래요. 미혹범부에 계속 머무는 걸 그냥 범부라고 그러고. 이제 보살이라고 그러는데, 보살이 이제 성불을 하기 위해서 공덕을 닦고 닦다 보면 팔지에 올라가는데, 팔지, 팔지에 올라간 보살(八地菩薩)은, -팔지 위에 이제 구지, 십지 하면 이제 여래가 되는데,- 팔지에 올라간 보살은 뭘 느끼느냐 하면, 자기 미래불이, 자기가 미래에 이루어질 부처가 자기 미래불이 환화현재자(還化現在者)라. 환화자현재(還化自現在)라, 도리어 자기의 현재를, 현재 자신을 교화를 시킨다. 그걸 느껴요. 자기미래불이 현재 자기를 인도를 해요. 그리고 어떻게 인도하냐. 항상 마정설법(摩頂說法)을 해요. 이 정수리 머리를 만지고 법을 설해줘요. 그걸 자견(自見)한다. 스스로 본다. 팔지보살이 되면 미래, 자아미래불이, 자기미래불이 환화자현재자 하느니, 자기를 도리어 교화하는 것을 딱 본다. 근데 이거를 어떻게 아냐. 이거는 이제 보살영락경이라고 하는데 있는데, 즉 성설이라(卽聖說), 성인의 말씀이니까 병연가지(炳然可知)라, 밝게 이거를 알 수가 있다. 팔지보살이 되면 자기 미래불이 자기를 교화해요. 자기 미래불이. ②又旣諸經云 “三世諸佛 拜敬故 諸罪業滅” 未來諸佛者 何乎 問 此他已成佛拜義 何爲自未成佛乎 우기제경운 “삼세제불 배경고 제죄업멸” 미래자불자 하호 문 차타이성불배의 하위자미성불호 答 拜他佛之義 非無而遠疎 所以者 凡諸佛 爲衆生 說佛德意 爲欲衆生 自亦得彼果 故令修行(...) 답 배타불지의 비무이원소 소이자 범제불 위중생 설불덕의 위욕중생 자역득피과 고령수행(...) 是故 正令吾發心修行佛 但吾當果(佛) 已成佛非他佛也(自己未來佛)(......) 시고 정령오발심수행불 단오당과(불) 이성불비타불야(자기미래불)(......) 그럼 자기 미래불이 이제 뭐냐라는 건데, 그러니까 이게 이제 어디 나오느냐면은, 신라 의상 스님이 신라에서 화엄경을 평생을 가르쳤는데, 그 의상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제자들이 많은 주석서를 남겼는데 그게 이제 이 책이에요.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이라고 하는데 이거는 뭐냐 하면 의상 화엄주석집이에요. 의상 화엄을 주석한 책이에요. 그래서 이걸, 고려 말에 이걸 정리해서 해인사 사간장경에 출판을 해서 그때 출판된 모습이 이런 모습(책을 보여주시면서)이거든요. 이게 얼마 안 돼서 그렇지, 이게 이건 축소한 거라 이게 4권이요. 4권. 이게 의상 화엄은 중국 화엄하고도 다른 정말로 희귀하고 심오한 화엄이에요. 의상 화엄이. 그래서 거기에 추혈문답(錐穴問答)이라고 있는데, 추혈이라는 거는 부석사에서 조금 다른 데로 가면 추동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 추동에서 100일 동안 화엄 법문을 했어요. 그거를 지통이라는 제자가 받아 적어서 전해지는 게 이게 이제 추동 문답인데, 그 추동 문답 중에 하나를 여기 이끌어온 게 지금 오늘 말씀드리는 내용인데요. 거기에 이제 의상 스님이 “삼세제불(三世諸佛)을 배경고로(拜敬故), 삼세제불을 예배하고 공경하는 고로, 제죄업이 멸(諸罪業滅)이라 했다. 모든 죄업이 소멸된다고 했다.” 그런데 미래제불자(未來諸佛者)는 삼세 제불 중에서 미래에 나타날 모든 부처님은 무엇이냐. 미래제불은 자기 미래불이라는 거예요. 미래불은 자기 부처다. 과거불도 나왔고 현재불도 계시는데 미래불은 뭐냐. 미래불은 자기불이에요. 자기가 미래불이 되는 거예요. 이게 핵심이에요. 미래불은 내 불이다. 자기 불이다. 이거예요. 그럼 자기 불은 지금 현재는 어떻게 계시냐. 요건데 그 의상 스님 제자 지통이라는 분이 최고 상수 제자인데, 그분이 태백산에서 삼세동일체, 삼세가 동일하다는 게 이제 화엄관법인데, 삼세 동일관법을 딱 닦고 있어. 삼세동일이라는 건 할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고, 손자가 있는데, 할아버지는 과거요, 아버지는 현재요, 손자는 미래예요. 근데 이 한자리에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도 한자리에 있고, 아버지도 한자리에 있고, 손자도 한자리에 있어. 근데 이걸 따져보면 할아버지는 과거요. 아버지는 현재예요. 손자는 미래예요. 이게 삼세 동일이다. 삼세가 하나다, 이게 화엄이거든요. 그래서 이 삼세동일체 화엄묘관을 딱 닦고 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자기가 머무는 그 토굴 앞에 멧돼지가 지나가요. 그래서 그걸 보고 법당에 가서 역시 불공을 올리고 절을 하는데, 그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이 말을 해요. 이게 또 수행 묘법이에요. 수행이 깊으면 법당에 계신 부처님이 말을 해요. 자기 마음이 밝아지면 온 천지에서 법을 설하는 거예요. 그래서 법당에 계신 부처님이 뭔 말하느냐. 조금 전에 지나간 멧돼지는 너의 과거고, 지금 예불하는 너는 너의 현재고, 여기 앉아 있는 나는 너의 미래다 이래요. 이거 뭐냐. 미래의 부처님은, 이 수행자의 미래 부처님은, 현재 설법하고 계시는 부처님이 나의 미래 부처님이다. 이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나의 미래불이고, 미륵존불이 나의 미래불이고, 아미타불이 나의 미래불이다. 이게 의상 스님의 가르침이에요. 지금 현재 나한테 발심하고 공덕을 닦게 하는 불이 나의 미래불이다. 지금 절하고 있는, 바라보는 부처가 나의 미래불이다. 이게 삼세 동일체거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지금 현재 있고, 아버지가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지금 현재 있고, 손자가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나 현재 여기 있다. 그러니까 예불로 하면 나도 지금 현재 부처님처럼 성불을 한다 이거예요. 예불이 성불이지, 지금 예불 떠나서 성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삼세가 동일하다. 이게 의상 화엄이거든요. 그래가지고 타이성불배의(他已成佛拜義)는, 그러니까 제자가 물어요. 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저 부처님이 이미 성불해서 내가 예배하는 뜻은, 하위자미래불고(何爲自未成佛乎), 자기 미래에 성불한 부처님이 되겠는가. 석가모니는 과거에 성불을 했는데, 어떻게 내가 미래에 성불한 부처님이 어찌 되냐, 이렇게 질문하거든요. 따져 물었어. 그러니까 답하되, 배타불지의(拜他佛之義)는,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이나 이런 분들 다른 부처님에게 예배 공경을 올린다고 하는 뜻은, 비무(非無)나, 없지는 않으나, 그러나 원소(遠疎)다, 너무 본뜻에서 멀어졌고 너무 거칠다. 그렇게만 보면 안 된다 이거예요. 소이자(所以者)하고, 이유는 무엇인가. 범제불(凡諸佛)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위중생(爲衆生)하야 중생을 위해서 설불덕의(說佛德意)는, 부처님의 덕을 말하는 뜻은, 일체제불이 중생을 위해서 부처님의 공덕, 이걸 경에서는 과덕이라고 그러는데, 부처님께서 이룬 결과의 공덕, 부처님의 과덕을 말하는 뜻은 과거 부처님만 계속 공경하라고 말했겠느냐 이거에요. 지금 그 법문을 듣는 그 사람 자신이 성불하라고 말한 거지, 부처님을 그냥 찬탄만 하고 예경만 올리라고 말한 게 아니다 이거에요. 그래서 말한 뜻은 위욕중생(爲欲衆生)하야, 중생을 위해서, 자역득피과(自亦得彼果)라. 스스로도 또한 저 부처님의 과덕을 얻게 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이 부처님 성불한 내력을 말하는 거는 그 다른 뜻이 아니다. 그 성불한 내력을 듣는 중생이 스스로 불과를 이루어서 성불하게 하고자 한 것이지, 만날 부처님만 찬탄하다 그만두라고 한 게 아니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되냐. 그렇기 때문에 중생을 보고 수행하라고 한 것이다. 스스로 성불하게 하기 위해서 수행하라고 한 것이지, 과거 부처님만 예경하게 하기 위해서 수행하라고 한 게 아니다. 아주 굉장히 중요한 그런 가르침인데요. 중간에 생략하고, 시고(是故)로, 이런 거로, 정령오발심수행불(正令吾 發心修行佛)은, 바로 나로 하여금 발심하고 수행하게 한 부처님은, 나를 발심하게 하고 나를 수행하게 한 부처님은 이게 이제 석가모니불이고 비로자나불이고 노사나불이고 다 그렇잖아요.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단오당과(但吾當果(佛))라, 여기 당과라는 말을 썼는데 마땅 당자인데요. 우리 말에 보면 본래다, 원래다 이런 말이 있어요. 본래 원래. 그런데 후래(後來), 뒤 후자, 올 래자, 후래다. 저 미래를 말하거든요. 후래에. 또 당래하생 미륵존불(當來下生 彌勒尊佛)이라고 당래라는 말이 있어요. 마땅 당자, 올 래자, 당래도 미래를 말하는 거예요. 그럼 당과라 그러면, 당래 내가 이루어야 할 부처님의 과덕이다 이 말이에요. 당과라 그래요. 거기다 불자 쓰면 당과불. 이거 좀 어려운 말인데 당과불은 미래불이에요. 나의 당래에 이룰 부처님. 당과불. 그래서 삼세동의를 여기서 설명하는 건데 나로 하여금 발심 수행하게 하는 현재불은 오직 나의 당과불이다. 나의 미래불이다 이 소리예요. 나의 미래불을 위해서 지금 발심 수행하게 하는 것이지, 현재 부처님만 찬탄하기 위해서 발심 수행하게 하는 게 아니다. 이게 이제 의상 스님의 가르침이거든요. 그래서 이성불(已成佛)은, 이미 성불한 부처님들은 비타불(非他佛)이라, 다른 부처님이 아니다. 자기 미래불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부처님을 보고 공경하는 것은 그 부처님이 딴 부처님이 아니고 나의 미래불이다 이거예요. 나의 미래불이다. 그러니까 예불하면 성불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뭣도 모르고 와서 예불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 다 성불하게 돼 있어요. 모르고 해도 공덕은 안 없어지거든. 그러니까 부처님을 찬탄하면 바로 그게 미래의 자기 성불이여.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면 그게 바로 자기미래불이다. 그게 이제 아버지가 있으면 이제 할아버지가 있고, 또 아버지가 있으면 밑에 또 아버지의 아들이 있으니까 손자가 있는 거예요. 과거·현재·미래가 한자리에 있어. 현재에 내가 예불하면 그게 자기 미래불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인지, 진짜 이런 게 이제 의상 화엄이거든요. 근데 의상 화엄은 중국 화엄하고 달라서, 중국 화엄은 문자 저술로 남긴 화엄인데, 의성 화엄은 제자를 깨우친 화엄이에요. 그래서 이게 제자가 끊어지면 이게 끊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문자가 안 남아가지고. 그런데 요만큼이라도 적어놨기 때문에 의성화엄주석집이라고 한 권으로 달랑달랑 들고오지만, 이게 축소해서 그렇고 여기에 어마어마한 뜻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지금 출현해 계신 이미 이룬 부처님은 타불이 아니고, 다른 부처가 아니고 자기 미래불이다. 그게 삼세 통일이다. 그래요. ③又他已成佛 卽是自當果佛 所以者何 他成佛時 即得三世佛平等果 우타이성불 즉시자당과불 소이자하 타성불시 즉득삼세불평등과 또 세 번째는, 우타이성불(又他已成佛)은 다른 부처님들이 석가모니불이나 미타불이나 약사여래불이나 이런 다른 부처님, 이미 성불한 부처님은, 다른이가 이미 성불한 부처님은 즉시자당과불(卽是自當果佛)이다. 곧 자기 미래불이다. 이거지 당과라는 건 아까 얘기했죠. 당래에 이룰 결과 부처님. 지금 성불한 부처님은 석가모니불은 자기 미래불이라는 거예요. 당과불이라는 거예요. 요거 아주 중요한 거거든요. 석가모니불은 나의 미래불이다. 즉시자당가불이라. 소이자하(所以者何)고, 이유는 무엇인가, 타성불시(他成佛時)에, 저 석가모니불이 성불을 할 때에, 즉득삼세제불평등과(即得三世佛平等果)라, 삼세 제불이 다 평등함을 얻는다. 이게 이제 뭐냐 하면. 석가모니불이 성불 딱 하고 나면요, 과거불이나 현재불이나 미래불이 똑같아요. 평등해요. 제불은 다 평등해요. 그러니까 내가 미래불이 돼도 지금 석가모니불하고 똑같아요. 그래가지고 불신보변시방중(佛身普遍十方中), 불신이 시방에, 시방세계에 두루하니 삼세제불이 일체동(一切同)이라, 삼세제불이 일체가 똑같다. 내가 미래의 성불한 부처나 과거의 성불한 석가모니불이나 지금 현재의 아미타불이나 지금 현재 석가모니불이나 똑같다. 삼세제불이 일체동이라. 어떻게 이런 법문을 해 주실 수가 있었는지 참 신기해요. 이게 저 경전 목판에 들어 있는데, 어찌 이걸 내가 볼 수 있었는지 그것도 아주 신기해요. 또 봐도 이걸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모를 수 있는 사람도 많지롱. 아주 신기한 게 많아요. 아주 신기한 게 많아. 그래가지고 타성불시(他成佛時)에, 저 석가모니불이 성불할 때에, 즉득 삼세 제불이 평등과(即得三世佛平等果)라, 곧 삼세제불이 평등한 결과를 얻는다. 똑같아 과거불이나 현재불이나 미래불이. 그러니까 내가 미래불이 됐을 때 지금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이나 똑같다 이거에요. ④又吾當果佛 即是他今成佛 所以者何 吾得當果佛時 卽得三世佛 平等法故(......) 우오당과불 즉시타금성불 소이자하 오득당과불시 즉득삼세불 평등법고 (錐穴問答,法界圖記叢髓錄卷4,175公司) (추혈문답, 법계도기총수록권4,175공사) 또 있어요. 오당과불(吾當果佛)은, 내가 마땅히 미래에 이룰 불은 즉시 타금성불(即是他今成佛)이니, 저들, 저 지금 부처를 이룬 부처님들이니, 소이자하(所以者何)고, 이유는 무엇인가. 오득당과불시(吾得當果佛時)에, 내가 당래 불과를 이룰 때에, 즉득삼세불 평등법고(卽得三世佛 平等法故)라, 바로 삼세불이 평등한 법을 얻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부처님들은 나의 미래불이다. 그러니까 지금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고 찬탄을 올리고 찬불가 또 불공을 올리는 것은 바로 나의 미래불을 이루는 거다. 그 미래불을 이루면 지금 내가 절한 부처님하고 내가 이룬 부처님하고 삼세불이 평등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 계신 분이 나의 미래불하고 똑같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절 한 번 하면 바로 부처님이 되는 거예요. 부처님 될 때 과거불, 현재불이 똑같다. 삼세제불이 일체동이라, 이런 진심으로 이제 부처님을 예불할 때 바로 불신을 얻어서 온 법계에 두루한 것이다. 이거죠. 마치겠습니다.